5화
‹ ›발자국은 대나무숲에서 시작해 마당 절반쯤 걸어오다가 갑자기 끊겨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어봤다. 흙이 눌린 깊이로 보아 몸무게가 꽤 나가는 뭔가였다. 발가락 자국까지 선명했는데, 다섯 개가 아니라 세 개였다. 그것도 발톱이 유난히 길고 뾰족했다.
"호랑아." 나는 개집 쪽을 불렀다. 호랑이가 느적느적 나와 발자국을 코로 킁킁거렸다.
"밤에 뭔가 넘어왔었네." 호랑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니가 활성화율 올려놓은 게 원인이다. 저쪽에서 이쪽 기운이 진해진 걸 눈치챈 거지."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나는 발자국이 끝난 지점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거기서부터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공기 속으로 녹아버린 것 같았다.
"발자국만 남기고 도로 넘어갔으니 일단은 넘어갔다. 근데 이런 게 자주 생기면 곤란하지." 호랑이가 대나무숲을 노려보며 말했다.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이럴 땐 안쪽 상황을 좀 봐야 한다."
"안쪽이라니, 게이트 너머 말하는 거야?"
"그래. 낮이니까 안전하다. 대신 오래는 있지 마라. 니 몸에는 저쪽 공기가 안 좋아."
몸에 안 좋다는 말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호랑이는 벌써 대나무숲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를 따랐다. 이 집에 온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나는 대나무숲 앞에 섰다. 어제보다 일그러짐이 확실히 짙었다. 대나무 잎이 흔들리는 방식도 어제와 달랐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뭔가 안쪽에서 밀려나오는 압력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손을 뻗자 이번에는 훨씬 쉽게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야가 잠깐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다른 공기가 나를 감쌌다.
숲이었다. 다만 서울 근교 산이나 강원도 산과는 다른 종류의 숲이었다. 나무 색깔이 미묘하게 짙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고, 하늘은 뭔지 모를 뿌연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안 되는 광원이었다. 공기에서는 비 오기 전 흙냄새 비슷한 게 났는데, 어딘가 상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기가 던전이라는 데다." 호랑이가 어느새 내 발치에 나타나 있었다. "게이트 너머, 저쪽 세계의 한 조각이지."
"조각이라는 게 얼마나 큰데?"
"모른다. 나도 여기 몇 번 안 와봤어." 호랑이가 짧게 대답했다. 그 무심한 말투가 오히려 더 불안했다.
걸음을 옮기자 발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뭔가 밟힌 소리였는데, 내려다보니 작은 열매 같은 게 터진 자국이었다. 껍질 색이 붉다기보다는 검붉었고, 안에서 나온 즙이 흙에 스며들며 김을 냈다.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얼마 안 가서 소리가 들렸다.
찍. 찌이익.
비명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나무 사이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몸을 낮추고 다가갔다. 호랑이가 내 뒤에서 낮게 으르렁댔다. 걸음이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발밑의 마른 잎을 피해 딛는 것도 어색하게 신경 썼다.
작은 나무 아래, 어제 만난 것과 같은 종류의 작은 존재 하나가 몰려 있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 작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몸집이 개만 한 검은 형체가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몸통에 이끼 같은 게 붙어 있었고, 눈이 붉은색으로 빛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통에서 뭔가 끈적한 게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몬스터다." 호랑이가 짧게 말했다. "저건 하급이긴 한데, 저 작은 것 하나 잡는 정도는 문제없어."
작은 존재가 도망치려 했지만 뒷다리 한쪽이 상처로 절뚝거렸다. 도망칠 힘이 없었다.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나무 밑동에 등을 붙이고 멈췄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검은 형체가 입을 벌리자 이빨 사이로 침 같은 게 흘렀다. 이빨은 생각보다 많았고, 생각보다 뾰족했다.
나는 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앞섰다.
"야!"
소리를 지르며 근처에 있던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 던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은 거라 무게가 안 맞았는데, 그래도 방향은 정확했다. 나뭇가지가 검은 형체의 옆구리를 때리자 그것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붉은 눈이 나를 정확히 조준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미친놈아, 도망쳐야지 왜 다가가." 호랑이가 낮게 짖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몇 걸음 더 다가가 있었다. 발이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검은 형체가 몸을 낮추고 나를 향해 도약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잡히면 끝이다.' 나는 옆으로 몸을 던지며 굴렀다. 어깨가 흙바닥에 부딪혔다. 아팠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구르는 와중에 흙과 마른 잎이 입에 들어갔다. 뱉을 틈도 없었다.
검은 형체가 방향을 바꿔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피할 각도가 없었다. 몸이 굳었다. 이대로 끝인가, 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다. 그 순간 호랑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이건 내가 감당한다. 니는 저 새끼 챙겨."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훨씬 낮고, 훨씬 무거웠다. 사람 말투를 흉내내던 개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그 몸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안 돼, 너 다치면..."
"내가 다치는 거보다 저 어린 게 죽는 게 더 큰 문제다." 호랑이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정도는 감당한다니까. 대신 나중에 밥 좀 챙겨라, 좋은 걸로."
말이 끝나기 전에 호랑이가 검은 형체에게 달려들었다. 개의 몸집으로는 무리인 상대였지만, 이빨이 부딪힐 때마다 짙은 빛이 번쩍였다. 산의 조각이라던 그 말이 이제야 실감났다. 저건 그냥 늙은 진돗개가 아니었다. 몸을 감싼 짧은 털이 순간순간 빛을 받아 은색으로 번쩍였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뭔가 오래된 것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나는 절뚝거리는 작은 존재를 품에 안았다. 축축하고 가벼운 몸이었다. 그것이 내 손바닥을 붙잡고 파르르 떨었다. 손톱, 아니 발톱 같은 게 손바닥을 살짝 긁었는데 아프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해야 할 말이었다.
호랑이와 검은 형체의 싸움이 계속됐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흙이 튀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은 존재를 안은 채 굳어 있었다.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 다시 그 파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긴급 조건 감지: 영지 관할 구역 내 생명체 보호 활동. 활성화율 +2%.'
숫자가 오르는 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돌덩이를 집어들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손에 쥐기 딱 좋은 무게였다. 표면이 거칠어서 손에서 미끄러질 걱정은 없었다. 호랑이가 검은 형체의 다리를 물어 균형을 무너뜨린 순간, 나는 그 돌을 검은 형체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퍽.
정확히 맞았다. 검은 형체가 순간 휘청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호랑이가 목덜미를 물어 뜯었다. 검은 형체가 몇 번 몸을 떨더니, 이내 검은 재처럼 부스러져 사라졌다. 남은 건 바닥에 눌어붙은 검은 얼룩과, 흙에 섞인 이끼 조각 몇 개뿐이었다.
숲이 다시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그렇게 요란하던 소리가 뚝 끊기니 오히려 그 정적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바닥에 흙과 나뭇잎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잘했다." 호랑이가 다가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몸에 상처가 몇 군데 있었지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털 사이로 살짝 붉은 자국이 보였는데, 호랑이는 그걸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돌 던지는 솜씨는 형편없는데,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어."
"형편없다면서 왜 맞췄대."
"운이지." 호랑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품 안의 작은 존재가 여전히 떨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펴서 보여줬다. 그것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바닥에 몸을 기댔다. 따뜻했다. 숨이 아주 빠르게 오르내리는 게 손바닥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이 녀석, 니한테 마음을 열었나 보다." 호랑이가 말했다. "이런 거 흔하지 않은데."
"왜 흔하지 않은데?"
"원래 이런 애들은 사람 잘 안 믿는다. 사람 때문에 죽는 경우가 더 많거든." 호랑이가 그 말을 하고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데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작은 존재를 조심스레 안고 일어섰다. 다리에 아직 힘이 덜 들어갔지만 그럭저럭 설 수는 있었다. 게이트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숲 안쪽을 돌아봤다.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굳어 있었다. 귀가 곧게 서고, 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다." 호랑이가 다시 걸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그냥... 방금 죽은 그 녀석 말고, 더 큰 뭔가가 이 숲 안쪽에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뒤를 돌아봤다. 짙은 보라색 나무들 사이로, 뿌연 빛이 스며드는 어딘가에서 낮고 무거운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온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랑이의 귀가 그 방향으로 곧게 서 있는 걸 보면,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소리는 한 번, 아주 짧게 울렸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뭔가가 이쪽을 알아채고 잠깐 숨을 참은 것처럼.
나는 품 안의 작은 존재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고 게이트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등 뒤로 그 소리가 다시 들려올까 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걸음을 옮길수록 나무들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았고, 뿌연 하늘도 어딘가 무게를 더한 것 같았다.
게이트 앞에 다다르자 호랑이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 안쪽은 다음에 봐도 늦지 않아." 호랑이가 말했다. 그 말투에서 평소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게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활성화율은 이제 두 자릿수로 올라가 있었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들은 그 울음소리가, 자꾸 귓가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