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명퇴 위기의 퇴마사

5화

본좌는 반보 물러서며 검을 세웠다. 놈의 팔—실은 팔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검은 촉수 같은 것—이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본좌는 그 궤적을 피하며 검을 뻗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잡배는 손가락 하나로 처리했을 터이나, 지금 이 몸은 아직 열여덟 해밖에 살지 못한 육체였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본좌가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이런 하급 요물 따위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을. 참으로 격세지감*이로다.' *격세지감: 세월이 많이 흘러 딴 세상처럼 느껴짐 검이 놈의 몸통을 갈랐다. 그러나— 서걱, 하는 소리 대신 스으윽, 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검이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마치 물속을 가른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이는... 필경 이상한 일이로다.' 본좌는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하급 요물이라 해도 검기를 실은 일격이 이토록 무저항으로 흘러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안개를 벤 것처럼, 검신에는 아무런 감각도 남지 않았다. '설마 이놈이 형체 없는 원한 그 자체란 말인가. 실체가 없다면 검으로 벨 방도가 없거늘.' 뒤편에서 촬영 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저거 뭔데 안 다쳐! 형, 그거 진짜 검 맞아요?!" "닥치고 물러서라 하였느니라!" 본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완전히 존댓말을 벗었다. 위기 앞에서는 위엄을 챙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근데 진짜 저거 뚫고 지나갔잖아! 저게 검이 뚫린 거야, 아니면 형이 헛손질한 거야!" "헛손질이라니, 이 무례한 자! 본좌의 검로에 헛손질이란 존재치 않느니라!" 말은 그렇게 뱉었으되, 속으로는 본좌 스스로도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검이 뚫려나가는 그 감각은 마치 허공을 후려친 것과 다름없었으니, 이는 필경 검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본질이 이상한 탓이었다. 놈이 다시 몸을 부풀리며 촉수 여러 갈래를 동시에 뻗었다. 본좌는 검을 회수하며 뒤로 크게 물러섰으나, 그중 하나가 본좌의 어깨를 스쳤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어깨를 관통했다. 살갗이 타는 듯한 열감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스며들었다. 두 개의 상반된 감각이 동시에 신경을 타고 흐르니, 이는 마치 화염과 빙설이 한 몸에서 다투는 것과 같았다. [경고: 미확인 속성 피해가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신체 상태 이상. 즉시 후퇴를 권고합니다.] [알림: 해당 속성은 시스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신종입니다.] '이 요망한 창까지 후퇴를 권한단 말인가. 참으로 심각한 일이로다.' '게다가 등록조차 되지 않은 속성이라니. 이는 필경 본좌가 살던 시절에도 존재치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사기(邪氣)*로다.' *사기: 요사스럽고 나쁜 기운 본좌는 어깨를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도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본 어떤 상처와도 달랐다. 손끝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본좌는 잠시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정신을 놓으면 그 즉시 저 요물의 밥이 될 것이니라. 아직 본좌는 이곳에서 죽을 팔자가 아니로다.' 놈이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형체가 조금 더 뚜렷해졌는데, 그 중심부에 희미하게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본좌는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것은... 최준혁이란 자와 닮았도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놈이 실종자를 삼켜 그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단순한 요물이 아니라 필경 인간을 먹이로 삼는 흉악한 존재였다. '인간을 삼켜 그 얼굴을 뒤집어쓴 자로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필경 요괴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좌는 그 얼굴을 다시 응시했다. 눈꺼풀은 반쯤 열려 있고,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벌어져 있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본좌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촬영팀은 이미 정신없이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아악! 나 좀! 나 좀 도와줘!" 놈의 촉수가 그쪽으로 뻗어가려는 순간, 본좌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딜 감히!" 검을 세로로 내리쳤다. 이번엔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완전한 관통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절단도 아니었다. 마치 젤리처럼 물컹한 것을 밀어붙이는 감각이었다. 놈이 낮게 울부짖으며 뒤로 몸을 젖혔다. '검이 통하긴 하는구나. 완전히 무형은 아니로다.' '허나 어찌하여 방금 전에는 그대로 흘러가고, 이번에는 걸리는 것인가. 필경 저놈의 본체가 일정치 않게 요동치고 있음이로다.' 본좌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검을 뻗었다. 그러나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팔 전체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검의 궤적이 평소보다 느려졌다. 마치 물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팔 전체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답답하도다. 본좌의 검이 이토록 둔해질 줄이야.' 넘어졌던 촬영팀 스태프는 그 사이 겨우 몸을 일으켜 절뚝이며 무리 쪽으로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확인한 본좌는 안도의 숨을 짧게 내쉬었으나, 그 순간이 오히려 방심이었다. 놈이 그 틈을 파고들어 촉수 여러 갈래로 본좌를 동시에 노렸다. 본좌는 몸을 틀어 하나는 피했으나, 나머지 둘은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퍼억— 갈비뼈 쯤에서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본좌는 뒤로 튕겨나가 벽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등짝을 타고 벽의 냉기가 스며드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갈비뼈 쪽의 충격이 온몸을 지배했다. '참으로... 강성한 놈이로다.' '이깟 잡배 하나에게 본좌가 벽에 부딪히는 신세라니, 이는 필경 후대에 전해지면 웃음거리가 될 일이로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로다.'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본좌는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어 번 미끄러졌으나, 그때마다 검을 땅에 박아 몸을 지탱했다. 놈이 천천히 다가오며 다시 그 형체 안쪽에 최준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살려달라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필경 놈을 벤다 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로다. 저 안에 갇힌 사람을 구해내야 함이니, 이 얼마나 난감한 노릇인가.' 본좌는 그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세웠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준혁이라는 자여, 만약 그대의 혼백이 아직 그 안에 남아있다면, 조금만 더 견디시오. 본좌가 반드시 그대를 구해낼 것이니라." 말은 그렇게 하였으되, 정작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검으로 베어도 완전히 죽지 않고, 그렇다고 놔두면 계속 사람을 삼킬 터였다. 본좌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통신기에서 강서연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이도현! 상태 보고해! 지금 뭐 하고 있어!" "..." "이도현! 대답 안 해?! 야, 너 죽었어?!" 본좌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놈이 다시 몸을 부풀리며 통로 전체를 뒤덮을 듯한 그림자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검은 먹구름이 통로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벽과 천장을 뒤덮었다. '이번 일격은... 필경 본좌의 전신을 노리는 것이로다.' '허나 이 육신으로는 저것을 온전히 받아낼 재간이 없으니, 참으로 진퇴양난*이로다.' *진퇴양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 검을 쥔 손이 땀으로 미끄러웠다. 어깨의 상처에서 흐르는 냉기가 어느새 팔꿈치까지 번져 있었다.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본좌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들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저 뒤의 어리석은 인간들이 죄다 저놈의 먹이가 될 것이니라. 본좌가 비록 이 옅은 육신에 갇혔다 한들, 그 정도의 도리는 아직 잊지 않았느니라.' 본좌는 숨을 몰아쉬며 최후의 기력을 검 끝에 모았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으는 그 감각이 마치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아팠다. 그림자가 통로를 가득 채우며 그대로 본좌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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