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평화란 참으로 기이한 재앙이었으니, 본좌는 그것을 깨닫는 데에 실로 오랜 세월이 걸렸도다.
서울의 밤하늘엔 더 이상 괴이의 울음이 울리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 앞 파라솔마다 청년들이 앉아 손바닥만 한 요망한 기계를 들여다보며 낄낄거렸고, 그 화면 속에서는 던전이라는 것이 무너지고 크리에이터라는 것들이 서로를 등쳐먹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던전 배신'이라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명이도다. 무릉도원*을 탐색하는 도우들이 서로를 배신하며 재화를 독차지하는 것을 만인이 지켜보며 웃는다니, 이 무슨 아수라장*인고.
*무릉도원: 별천지,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던전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
*아수라장: 싸움이나 그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진 곳
듣기로 그 콘텐츠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다 하였다. 무릉도원에 들어간 도우 다섯이 서로에게 미리 독약을 먹이고, 함정을 파고, 뒤통수를 치는 광경을 수십만 명이 지켜보며 손바닥만 한 기계에 재화를 쏟아붓는다는 것이었다. 본좌는 이를 두고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배신이란 본디 은밀히 행해야 그 묘미가 있는 법이거늘,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신을 행하고 그것으로 명성과 재화를 얻는다니, 참으로 세상이 말세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본좌의 이름은 이도현. 겉으로는 열여덟 고등학생이나, 그 속에는 전생 구주*를 종횡하며 마두들의 목을 베어온 검신의 혼백이 잠들어 있었느니라.
*구주: 아홉 개의 큰 고을, 즉 온 세상을 뜻하는 말
헌데 이 세상에 다시 눈을 뜬 지 열여덟 해, 본좌가 몸을 의탁한 조직 '청명회'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져만 갔다.
[알림: 이번 달 청명회 소속 요원 실적 등급이 하위 20%에 진입하였습니다.]
[알림: 소속 지부의 예산이 전월 대비 34% 삭감되었습니다.]
[알림: 분기 평가 결과에 따라 장비 지원 등급이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존댓말로 알려오는 저 요망한 창은 언제나 본좌의 아침을 재앙으로 물들이는 법이었다. 참으로 방자하도다*, 감히 본좌에게 등급을 논하다니. 전생에는 그 누구도 본좌의 검 앞에서 등급 따위를 매기지 못했건만, 이 시대의 요물은 매일 아침 이불 속까지 파고들어 본좌의 위신을 갈아 마시는 데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방자하다: 조심스럽지 않고 무례하다
하나 화를 낸다고 세상이 바뀔 리 없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밤마다 골목마다 괴이가 출몰하여 인세가 어수선했다 하나, 지금은 그런 일이 백 리에 한 건 날까 말까였다. 세상이 평화로워진 것이야 필경 경사스러운 일이거늘, 어찌하여 본좌의 곳간*은 이토록 텅 비어가는 것인가.
*곳간: 여기서는 통장, 지갑을 뜻하는 표현
등굣길, 편의점 삼각김밥을 씹으며 걷는데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본좌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그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이 늦다며 눈총을 준 것이었다. 참으로 굴욕스럽도다. 전생에 본좌가 저잣거리를 지날 적엔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노인들이 술 한 잔을 권하였거늘, 이 시대에는 삼각김밥 하나 집는 손놀림이 굼뜨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저기요, 학생. 뒤에 사람 밀려요."
"..."
본좌는 말없이 공납*을 내밀었다. 공납이라는 것도 참으로 요사스러운 물건이었다. 종이 한 장 없이 곳간의 재화가 오가는 그 원리를 본좌는 아직도 완전히 깨닫지 못했으나, 그것이 편리하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납: 여기서는 신용카드, 체크카드를 뜻하는 표현
청명회 지부는 낡은 오피스텔 3층에 자리했다. 예전엔 대로변 5층짜리 건물 전체를 썼다 하나, 이제는 층 하나도 못 채워 옆 사무실에 부동산 중개소가 세를 든 형편이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부동산 중개소 유리문에 붙은 매물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종잇장의 개수가 청명회 사무실 문패보다 더 많은 것 같아 볼 때마다 심사가 뒤틀렸다. 이를 두고 오현석 부장은 '유연한 조직 개편'이라 부르고, 본좌는 '몰락'이라 불렀다.
사무실 문을 열자 김민재가 헤드셋을 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는 청명회의 통신을 담당하는 자로, 본좌보다 서너 살 위였으나 격식은 늘 반말과 존댓말 사이를 오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컵라면 세 개가 빈 채로 쌓여 있었는데, 그것이 지부의 재정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물증이 아닐까 본좌는 생각했다.
"어, 도현아. 왔어?"
"통신관은 어찌 이리 게을리 앉아 있는고. 오늘도 일거리가 없단 말이냐."
"일거리는 있는데... 좀 이상해서."
김민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순간 본좌는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전조였다. 사무실 안의 낡은 선풍기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마저 갑자기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상하다니, 그 말이 무슨 뜻이더냐."
"경찰청에서 직접 의뢰가 왔어. 그것도 지휘부 통해서 말고, 우리 지부로 바로."
본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경찰청이라는 곳은 본디 청명회를 무시하기로 유명한 관아*였다. 헌터라는 것들이 통행패를 들고 뛰어다니는 지금 세상에, 낡아빠진 퇴마사 조직에 직접 손을 뻗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지난 이 년간 경찰청에서 청명회로 연락이 온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헤아려 보았으나, 손가락을 다 접기도 전에 셀 수 있는 수준이었다.
*관아: 관청, 관공서를 뜻하는 옛말
"그것이 무슨 사건이관대 그리 급히 온단 말이냐."
"잠깐만, 화면 좀 볼래?"
김민재가 모니터를 돌려 보였다. 화면엔 실종자 신고서가 떠 있었다. 이름, 최준혁. 나이 스물넷. 직업란에는 '크리에이터'라 적혀 있었다.
"실종자 이름 봐. 최준혁, 들어본 적 있어?"
본좌는 고개를 저었다. 김민재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던전 배신' 콘텐츠로 제일 유명한 놈이야. 구독자가 이백만이 넘어."
"그것이 무엄한 콘텐츠라 함은 알겠으나, 어찌 본좌가 그런 것을 안단 말이냐."
"몰라도 돼. 근데 이게 왜 우리한테 넘어왔는지가 더 이상해."
김민재가 화면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몇 번이고 멈추다가 다시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 그도 이 사건을 두고 어지간히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실종 지점 던전에서, 낮인데도 괴기 반응이 터졌대. 완전 정상범위 밖으로."
"낮인데도 말이더냐."
"어. 그것도 그냥 살짝 넘은 게 아니라, 측정기가 아예 튕겨나갔대. 계기판이 고장 났다고 오해할 정도로."
본좌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낮에도 강한 괴기를 뿜는 존재라니, 이는 세상이 평화로워지며 나날이 쇠약해지던 괴이들의 습성과는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전생의 이치로 따지자면, 이는 마두가 대낮에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살계를 열겠다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는 대사건이었다.
'참으로 괴상하도다.' 본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는 필경 심상치 않은 전조이리라.
"게다가 실종된 놈이 그 순간에도 촬영을 하고 있었대. 마지막 영상이 아직 서버에 남아있는데, 그게... 좀 그래."
"좀 그래라 함은 어떤 의미더냐."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도 아직 소리는 못 들었어. 영상 자체가 이상하게 끊겨."
본좌는 그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통신관이 스스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언가가 그 영상을 가로막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불길한 조짐이로다.
김민재의 헤드셋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받는 순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어, 강 사무관님... 네? 지금 바로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김민재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만으로도 그 내용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몇 번이고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하는 동안, 본좌는 팔짱을 낀 채 낡은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하나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의 떨림이 마치 이 사건의 전조를 알려주는 신호처럼 느껴져, 본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본좌는 그 목소리의 온도를 느끼며, 이 사건이 결코 평범한 실적 채우기용이 아님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