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식신이 전생 원수라니

3화

잔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환진이 꺼진 자리엔 새까맣게 탄 자국만 남아 있었다.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바닥에 그려놓은 진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붓끝으로 몇 시간을 들여 그린 선들이었는데. 빛이 한 번 크게 일었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을 때. 나는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허탈했다. 정확히는, 허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이 저릿했다. 검은 자국 한가운데, 작은 얼룩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나는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착각이라고 치부하려 했다. 밤을 새워 진을 그린 탓에 시야가 흐려진 거라고. 세 번째로 눈을 깜빡였을 때, 얼룩은 더 커져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숨을 삼켰다. 방바닥에서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보였다. 실내인데. 한겨울도 아닌데. 에어컨도 켜지 않았는데. 계절은 분명 가을이었는데. 온도가 떨어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방 안의 공기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벽에 붙은 달력을 봤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계절만 멈춘 것 같은 감각. 검은 얼룩이 부풀어 올랐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네 개의 다리, 길쭉한 몸체,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털. 처음엔 다리 하나가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듯 솟았다. 그다음 두 번째 다리. 세 번째, 네 번째 다리가 차례로 바닥을 짚었을 때, 나는 이미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몸체가 길게 늘어졌다. 등뼈를 따라 은빛 털이 결을 세우며 자라났다. 꼬리가 마지막으로 그림자에서 풀려나왔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차가운 벽지의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박혔다. 그것이 완전히 일어섰을 때, 방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컸다. 좁은 원룸 안에서 그 크기는 비현실적이었다. 천장 조명이 짐승의 등에 가려 그림자가 방 전체를 덮었다.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낮고, 규칙적이고, 무거운 숨소리였다. 은빛 마랑.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람의 기억이 다시 속삭였다. 천랑. 기억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아주 짧게, 파편처럼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천랑이라는 이름 하나만 툭 떨어뜨리고, 나머지는 침묵했다. 두 눈이 이글거리는 붉은색이었다. 그 눈이 나를 향했다. 숨이 멈췄다.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인사하듯이. 거대한 몸이 움직이는 데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소름을 돋게 했다. "주인님."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짐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턱이 굳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래 기다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처음 소환진을 그렸는데. "오래, 라니."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난 오늘 처음 이걸 그렸어." 천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눈만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히고 열리는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몇 시간을 기다린 게 아니야?" 내가 다시 물었다. "몇 년이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 "시간은 인간의 단위입니다." 천랑이 말했다. "저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흐릅니다." 그 대답이 더 무섭게 들렸다. "넌 뭐야." 겨우 그 말이 나왔다. "당신의 식신입니다." 짐승, 아니 천랑은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데이터를 읽듯 담백했다. "식신."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더 이상했다. "진짜야." 혼자 중얼거렸다. 실패가 아니었다. 소환진이 흔들리고 빛이 꺼졌던 건 실패의 신호가 아니었다. 대가를 치르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빛이 꺼지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방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귓속이 먹먹해졌었다. 그 직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던 몇 초. 그게 실패의 감각이 아니라 대가의 감각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무엇을 치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몸의 어딘가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봤다. 다섯 손가락 모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기쁨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웃음이 나야 했다. 그런데 웃음 대신 손끝만 떨렸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뭔가를 알아챈 것 같았다. 나는 천랑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세 번째 걸음에서 짐승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냉기가 짙어졌다. 체온이 있는 생물이라면 이럴 수 없었다. 그런데 숨소리는 분명 살아 있는 것의 숨소리였다. 손을 뻗었다. 은빛 털에 손끝이 닿았다. 차가웠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흘러들어왔다. 짐승의 기억 같은 것이었다. 처음엔 흐릿한 잔상이었다. 색이 없는 화면 같은 것. 그러다 갑자기 선명해졌다. 눈이 쏟아지는 벌판. 달려가는 발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는 다급했다. 누군가 도망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쫓고 있었다. 어느 쪽이 나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너무 낯익어서 문제였다.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쫓는 쪽의 웃음이었는지, 쫓기는 쪽의 웃음이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다만 그 웃음소리가 내 귀에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다. 다정하게 웃던 그 목소리. 몇 번이나 들었던 목소리였다. 연회에서, 전장에서 돌아온 뒤, 훈련을 마치고 나온 성문 앞에서. 언제나 다정했다. 언제나 나를 안심시키는 톤이었다. 나는 손을 뗐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슴이 조여왔다. 숨을 들이켜려 해도 공기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이 뛰는 게 손끝에 그대로 전해졌다. 너무 빨리, 너무 세게. "너." 목이 잠겼다. "방금 뭐였어." 천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보였다. 침묵이 길었다. 방 안의 냉기가 다시 조금씩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천랑의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말해." 목소리가 떨렸다. "방금 그 장면. 그 목소리. 뭐였는지 말해."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붉은 눈동자 안쪽에서 뭔가가 잠깐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감정인지 반사광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금 느낀 온도 때문이 아니었다.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피부 표면이 아니라 뼛속에서부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 착각이길 바랐다. 그런데 다시 떠올릴수록 더 선명해졌다. 음정 하나, 웃는 타이밍 하나까지 정확하게 일치했다. 유겸. 나를 죽였던 그 친우의 목소리였다. 방 안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얼어붙고 있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더 짙어졌다. 천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 속에서,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너, 그 사람을 알아?" 천랑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울었다. 대답 대신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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