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식신이 전생 원수라니

2화

새벽 1시 40분. 온 집이 잠들었다. 나는 아직 깨어 있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그 빛조차 희미했다. 방 안의 어둠을 다 밀어내지 못했다. 책상 위에 식신전서를 펼쳐 놓았다. 표지는 낡았고, 종이는 누렜다. 하람의 것이었다. 아니, 이제는 내 것이었다. 마지막 장의 붉은 글씨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모든 소환에는 대가가 따른다.] 붉은 잉크가 아니었다. 색이 변한 걸 보면 다른 무언가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가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읽을수록 더 흐려졌다. 구체적인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서를 앞뒤로 넘겨봤다. 소환에 대한 항목은 스물세 장이나 됐다. 대가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상할 게 없었다. 대가라는 건 원래 미리 알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하람으로 살던 시절도 그랬다. 계약 문서 마지막 줄에 작게 적힌 문구들. 아무도 미리 설명해주지 않았다. 당해보고서야 알게 되는 것들. 페이지를 다시 넘겼다. 소환진의 형태가 그려진 장이 나왔다. 원 두 개, 그 안에 오각형, 오각형 꼭짓점마다 알 수 없는 고대 문자. 문자를 하나씩 손끝으로 짚어봤다.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모르는 글자인데 모르지 않은 느낌. 하람의 눈이 이 문자를 몇 번이나 읽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종이 위에 그 문양을 옮겨 그렸다. 손이 떨렸다. 선 하나를 그리는데 이마에 땀이 맺혔다. 먹지도 않은 저녁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원을 그렸다. 두 번째 원을 그렸다. 오각형을 그렸다. 꼭짓점마다 문자를 새겼다. 한 획, 한 획, 전서의 그림과 똑같이. 틀리면 안 됐다. 틀리면 어떻게 되는지 전서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요력 0.3짜리 몸으로 이런 걸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만 원짜리 부적보다 못한 수준. 그런 몸으로 소환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람의 기억은 계속 말했다.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기억 속에서 하람은 이보다 훨씬 작은 진으로도 뭔가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불렀는지는 흐릿했다. 다만 그 감각, 손끝이 저리던 그 느낌만은 선명했다. 지금 내 손끝도 저렸다. 같은 감각이었다. 오전 2시 03분. 소환진을 완성했다. 방바닥에 그린 원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분필로 그린 게 아니었다. 피였다. 손가락을 그은 기억이 없는데, 손끝에 상처가 나 있었다.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피는 이미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차가운 바닥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방 안 온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이 자리만 차가웠다. 손바닥을 원 중앙에 올렸다. 주문은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낯선 언어였다. 그런데 발음이 틀리지 않았다. 하람의 혀가 기억하는 언어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내 입에서 나오는데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발음 하나하나가 낯설고 동시에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에 배운 걸 잊고 있다가 갑자기 떠올린 느낌. 주문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숨을 쉬는데 폐에 뭔가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주문이 끝나는 순간, 소환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빛은 은은한 청색이었다. 원 안의 문자들이 하나씩 떠올라 회전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문자가 회전할 때마다 바람이 일었다. 방 안에 창문 하나 열려 있지 않았는데 바람이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게 진짜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전서에 적힌 게 다 진짜였구나.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차올랐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이 흔들렸다. 빛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에는 빛이 절반쯤 꺼졌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전서를 다시 볼 시간이 없었다. 손을 뗄 시간도 없었다. 아니, 손을 떼면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게 아니라 타는 것 같았다. 살이 익는 냄새가 나야 하는데 나지 않았다. 분명 뜨거운데 냄새가 없었다. 이상했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신호일 수도, 나쁜 신호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진 안의 회전이 점점 느려졌다. 문자들이 하나씩 힘을 잃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췄다. 빛이 전부 꺼졌다. 방 안은 다시 어둠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은 흘렀는데 내가 그걸 느끼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운 뒤였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을 뗐다. 손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화상 자국도, 상처도 없었다. 방금까지 타는 것 같던 감각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 있었다. 손바닥을 몇 번이나 뒤집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실패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서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릎이 다시 바닥에 닿았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몸이 무거웠다. 마치 몸속에서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 무언가 빠져나갔다.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몸 안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봤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는 게 있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원래 거기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어진 것 같은 감각.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시계를 봤다. 오전 2시 19분. 소환을 시작한 지 16분이 지나 있었다. 16분.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몸은 몇 시간이 지난 것처럼 지쳐 있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소환에 실패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해야 하나. 그런데 다시 할 힘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서를 다시 펼쳐볼까 했지만 손을 뻗을 힘도 없었다. 책상까지의 거리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세 걸음이면 갈 거리였다. 나는 소환진 앞에 엎드렸다.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이마로 전해졌다. 기분 좋은 냉기였다. 지금 몸에서 나는 열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숨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실패였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편했다. 실패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니까. 아무것도 잃지 않은 거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실패했다면 이럴 이유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몸이 이렇게 텅 빌 이유가 없었다. 뭔가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소환진의 잔재만이 바닥 위에 검은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핏자국이 말라 검게 변해 있었다. 문자의 형태는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그 자국 한가운데서, 아주 미세하게,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다시 봤다. 분명히 움직였다. 검은 자국 한가운데, 아주 작은 점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기는 손톱만큼도 안 됐다. 그런데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멈췄다. 심장이 다시 조여들기 시작했다. 이건 실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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