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방 안은 어두웠다.
불도 켜지 않았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이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열두 살이었다.
황가의 막내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아침, 조부님은 나를 보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다.
그 전날도 그랬다.
정확히는 삼 년째였다.
삼 년 전 그날부터, 조부님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마치 내가 투명한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아침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다음 사람에게로 시선이 넘어갔다.
황가는 삼백 년간 이 땅의 요괴를 잡아온 명가였다.
조상들의 위패가 사당을 가득 채웠다.
그 이름들 옆에 내 이름이 놓일 자리는 없었다.
사당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위패의 숫자를 세곤 했다.
서른둘.
서른두 개의 이름이 나무판 위에 새겨져 있었다.
언젠가 그 옆에 서른세 번째 이름이 걸릴 거라고 배웠다.
그 이름이 내 것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말한 적이 없었다.
요력 측정은 여섯 살에 끝났다.
숫자는 정확했다.
0.3.
평범한 아이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수치였다.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소리로 남아 있었다.
측정관의 목소리가 떨렸던 것.
"다시 측정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조부님이 짓던 표정.
표정이 아니라, 표정이 사라지는 과정.
숫자판에 0.3이 뜬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어머니만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 온기만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후계 서열에서 지워졌다.
지워졌다는 말은 정확했다.
호적에서 이름이 빠진 건 아니었지만, 모두의 대화에서 나는 사라졌다.
식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들은 술법 얘기를 했다.
"오늘 3식 부적을 완성했어요."
"3식이면 대단하네. 나는 아직 2식도 버거운데."
"조부님이 4식까지 가능하다고 하셨어."
숫자가 오갈 때마다 나는 밥그릇만 내려다보았다.
1식, 2식, 3식, 4식.
그 숫자들은 나에게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밥만 먹었다.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게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건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매번 확인하는 일이었다.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슬프지 않다는 사실이 슬펐다.
전생의 기억은 파편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
하람.
소환사였고, 왕의 손님이었고, 어느 나라의 영웅이었다.
그 기억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가끔 눈을 감으면 낯선 궁전의 천장이 보였다.
붉은 기둥과 금빛 문양.
사람들의 함성.
전장에서 소환진이 펼쳐지던 순간의 열기.
그 모든 게 조각난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붙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만 죽는 순간만은 선명했다.
잔에 든 술.
다정한 웃음.
그리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통증.
그 통증은 지금도 생생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불길.
숨이 막히던 감각.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던 것 같은데, 그 손의 주인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웃음의 주인 이름도 기억났다.
유겸.
내 유일한 친우였다.
나를 죽인 사람이었다.
유겸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런데 그 웃음만은 또렷했다.
눈매가 접히는 방식, 입꼬리가 올라가는 속도, 그 모든 게 재생되듯 반복됐다.
왜 그가 나를 죽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웃음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마치 그 웃음 하나가 전생의 전부인 것처럼.
가끔은 그 기억이 진짜인지도 의심스러웠다.
0.3의 요력을 가진 아이가 지어낸 망상일지도.
하지만 그 통증의 감각만은 지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죽음.
그건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오후 9시 17분.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이서연.
손에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는 늘 조용했다.
문을 여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배려하는 것처럼.
"밥은 먹었어?"
"먹었어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저녁상은 절반도 비우지 않고 물러났다.
어머니는 알아챘을까.
표정을 보니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다시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는 갈색으로 낡아 있었다.
제목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식신전서(式神全書).
책의 모서리는 닳아서 둥글게 변해 있었다.
표지 가죽에서는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났다.
먼지와 습기가 섞인 냄새.
누군가의 손을 수십 년간 거쳐 온 물건에서만 나는 냄새였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의 할머니가 쓰던 거래."
어머니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무 조롱도 없었다.
"우리 가문에는 원래 요괴를 잡는 술법 말고, 다른 방식도 있었대."
"다른 방식이요?"
"소환술."
낯선 단어인데 낯설지 않았다.
손끝이 저릿했다.
소환술이라는 말이 귀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오래 잠겨 있던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왜 아버지 쪽이 아니라 어머니 쪽에서 내려온 거예요?"
"여자들만 배웠거든. 어느 시점부터는."
"왜요?"
"몰라. 나도 물어본 적 없어."
어머니는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 손짓에는 익숙함이 묻어 있었다.
이 책을 몇 번이나 만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필요할 것 같다는 말.
그 말 속에 담긴 게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목이 막혔다.
어머니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책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책의 무게는 가벼웠다.
그런데 손바닥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무리하지 마라."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표지만 바라보았다.
식신전서라는 네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글자 위로 손끝을 가져갔다.
차가웠다.
종이인데 이렇게 차가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나는 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두 번째 장도 마찬가지였다.
빈 종이가 이어질 때마다 손끝으로 넘기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세 번째 장에 도달했을 때, 종이 위에 검은 선이 스스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숨을 멈췄다.
선은 종이 표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잉크가 종이 안쪽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표면으로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선은 원을 그렸다.
원 안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채워졌다.
나는 그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읽을 수 있었다.
소환진.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오한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문자들은 낯선 언어였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순간 뜻이 저절로 흘러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배웠던 걸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배운 적 없는데 아는 지식.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이건 하람의 지식이었다.
0.3의 요력을 가진 황시우의 것이 아니었다.
손이 떨렸다.
책장을 붙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나는 이 책을 덮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은 반대로 움직였다.
더 깊이, 더 안으로.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넘어가는 속도는 일정했다.
누군가 옆에서 손끝으로 넘기는 것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바람이 없는 방 안에서 종이가 스스로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장에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모든 소환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방 안의 온도가 갑자기 낮아진 것 같았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창밖의 빗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아니, 빗소리는 그대로였다.
내 심장 소리가 커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지 않았다.
대가가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붉은 글씨 아래로, 무언가 더 적혀 있는 것 같았다.
글자가 희미하게 떠오르다가, 다시 사라졌다.
마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는 그 여백을 오래 바라보았다.
빈 자리인데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여백.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책을 쥔 손끝이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