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독자 0명, 우아한 배신자

5화

빛이 사그라들고 대기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은 여전히 차가운 대리석이었다. 방금까지 나를 감쌌던 순간이동의 잔광이 눈앞에서 부스러지듯 흩어졌고, 나는 그 잔상을 눈으로 쫓다가 이내 시선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돌렸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이 상황에 적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사람 목숨이 오가는 자리에서 빠져나왔는데, 제일 먼저 하는 게 조회수 확인이라니. 전생에서도 야근하다 퇴근길에 SNS 알람 확인하던 버릇이 이렇게까지 질기게 따라올 줄은 몰랐다. 조회수는 내가 보는 동안에도 초 단위로 갱신되고 있었다. 숫자 뒤에 붙은 콤마가 하나씩 늘어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 정상에서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위가 붕 뜨는 느낌, 손끝이 저릿한 느낌, 그런데도 눈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아이러니. 나는 손이 떨리는 걸 억누르며 상단에 걸린 커뮤니티 게시글을 눌러보았다. 제목은 '흑호 혈아, 정체불명 드레스녀에게 관광당함(영상)'이었고, 조회수 옆에 붙은 댓글 수가 벌써 이천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천 개라니. 내가 전생에 다니던 회사 사내 게시판 공지사항 조회수보다 많은 숫자다. 씁쓸한 비교였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댓글창을 내리면서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한쪽은 '이거 진짜냐, 실력 미쳤다', '저 드레스 입고 저런 움직임이 가능해?', '관절이 어떻게 저렇게 꺾이지 저거 사람 맞음?'이라며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현하는 반응이었고, 다른 한쪽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움, AI 합성 아니냐', '움직임 매끄러운 게 사람 관절 각도가 아닌데', '저 프레임 사이 텀 봐라 조작 티 난다'라는 의심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의심 댓글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팔을 꺾을 때 온몸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지금도 팔뚝 안쪽이 뻐근하게 저려오는데, 그걸 합성이라고 의심받는 것도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다. 몸으로 겪은 고통을 부정당하는 기분이란, 생각보다 묘하게 서운한 구석이 있었다.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냥 팔뚝을 슬쩍 문지르며 넘기기로 했다. 대기실 벤치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을 계속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한 줄기 댓글에 시선이 멈췄다. '광희 채널 실시간에도 이 영상 올라옴, 광희 반응 대박'이라는 문구였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광희의 채널을 검색해보았고, 놀랍게도 그녀의 최신 방송 다시보기 클립 하나가 이미 백만 조회수를 넘긴 채 화면 상단에 걸려 있었다. 백만이라니. 내가 지금 마주한 숫자와는 애초에 체급이 다른 세계였다. 클립 제목은 '혈아 근황 확인해주는 광희 ㅋㅋㅋ'였는데, 나는 그걸 재생하며 목을 살짝 뒤로 젖혔다. 벤치 등받이에 목덜미가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화면 속 광희는 화려한 붉은 로브 차림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로브 자락에 수놓인 금빛 문양이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고, 그녀의 표정은 시청자를 향해 완벽하게 계산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 혈아 오빠 요즘 힘드시겠다, 순위도 밀리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고." 그 목소리에는 걱정을 가장한 조롱이 은근하게 배어 있었고, 채팅창에는 그 발언에 웃음과 야유가 뒤섞여 쏟아지고 있었다. 'ㅋㅋㅋㅋ광희 오지네', '혈아 이제 어떡하냐', '저격 스타일 봐라 진짜'.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위기가 곧바로 다른 누군가의 콘텐츠가 되어버리는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나 역시 지금 이 순간 그 콘텐츠의 일부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어쩐지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서글펐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을 때, 문득 내 채널 '백조'의 채팅창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동안 그 채널은 존재 자체를 잊고 지낸 것에 가까웠다. 방송을 켜놓고 한 시간이 지나도 채팅 한 줄 올라오지 않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앱을 열어 실시간 채팅을 확인했는데, 화면이 미친 듯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겨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 채널 뭐야 갑자기', '팔로우 안 누르고 뭐했냐 나', '드레스녀 정체 아는 사람?', '이 사람 진짜 정체가 뭐냐', '방송 언제 다시 켜요', '목소리라도 좀 들려주세요 제발'. 1년 동안 단 한 줄의 채팅도 남지 않았던 그 창이, 이제는 초당 수십 개씩 새로운 메시지로 뒤덮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떡상'이라는 건가. 1년을 버틴 보람이 하루아침에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정작 반가움보다 당혹감이 먼저 앞섰다. 구독자 수를 확인하려고 상단을 눌렀을 때, 그 숫자마저 눈에 띄게 불어나 있었다. 어제까지 세 자릿수였던 게 이제는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변화를 눈으로 좇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전생이었다면 이 정도 성장세에 밤새 축배를 들었을 텐데, 지금은 축배보다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먼저였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런 관심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걸, 이 바닥에서 몇 번이고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그때, 화면 한쪽에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개인 메시지였는데, 발신자 이름이 '흑호 클랜 매니지먼트'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열어보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가 이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손끝으로 화면을 눌렀다. 메시지 내용은 짧고 단호했다. '귀하가 오늘 개입하신 사건에 대해 논의가 필요합니다. 신원 확인 및 만남을 요청드립니다.' 문장 아래에는 담당자 이름과 연락 가능한 시간대, 그리고 만남을 원하는 장소로 추정되는 좌표 하나가 덧붙여 있었다. 사무적이다 못해 냉기가 도는 문체였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신원 확인이라니.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우아한 배신자, '백조'라는 정체성 뒤에 숨은 진짜 얼굴을 드러내라는 요구와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조심스럽게 흔적을 지웠던가. 방송 목소리 하나까지 신경 써서 조절했고, 얼굴이 드러날 만한 각도는 철저하게 피해왔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개입으로 이렇게 판이 뒤집힐 줄은 몰랐다. 나는 메시지를 든 채로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는데, 등 뒤 대기실 창문 너머로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림자의 끝은 문 앞까지 닿아 있었고, 나는 그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그림자처럼, 내가 숨겨온 것들도 결국 어딘가까지는 길게 늘어져 닿게 되어 있는 걸까. 스마트폰 화면 속 좌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손끝이, 아까 팔뚝의 저림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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