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독자 0명, 우아한 배신자

1화

촉촉한 이끼 냄새와 지하수 특유의 비릿한 습기가 뒤섞여 코끝을 찔러올 때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살짝 들어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얀 레이스와 은실로 짜인 치맛단이 던전의 습한 벽을 스치지 않게 신경 쓰는 것도 이제는 몸에 붙은 습관이었는데, 사실 이 옷 한 벌 세탁비가 이번 달 후원금 전액보다 많이 든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원금이 '전액'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민망한 수준이라, 세탁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농담이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이끼 낀 돌기둥들 사이로 희미한 인광이 번지고, 발밑에서는 고인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앞쪽에서 슬라임 하나가 흐물흐물 몸을 부풀리며 다가오자, 나는 손목에 걸린 은빛 채찍—정확히는 채찍형 마도구인데, 나는 그걸 '리본'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을 가볍게 휘둘렀다. 리본 끝의 마력 코팅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고, 슬라임은 단 한 번의 타격에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흐물흐물 퍼졌다. 뒤이어 벽 틈에서 두 마리가 더 스며 나오듯 기어 나왔지만, 나는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는 배신자는 화면에 잘 안 나온다는 게 내 나름의 철학이었다. 리본을 손목에서 살짝 풀어 반원을 그리듯 휘두르자, 두 마리 모두 동시에 몸통이 갈라지며 바닥에 퍼졌다. "어머, 이렇게 성급하게 다가오시면 곤란해요."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걸 알면서도 우아한 어조로 중얼거렸는데, 그건 순전히 습관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매단 조그만 수정구, 영석(映石)이 은은한 청색 빛을 뿜으며 이 모든 장면을 실시간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석 속에 뜬 작은 창을 곁눈질로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내쉬었다. [현재 시청자: 0명.] 정확히 0이었다. 정말이지, 이 숫자는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한결같아서 차라리 고정 수치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1년째 이 채널 '백조(白鳥)'를 운영하면서 이렇게까지 완벽한 무반응을 유지하는 것도 나름의 재능이 아닐까 하고 자조했다. 어느 던전 공략 스트리머는 슬라임 하나 잡는 것만으로도 후원이 폭죽처럼 터진다던데, 나는 슬라임 세 마리를 우아하게 처치하는 동안 채팅창에 물음표 하나도 뜨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완전무결한 무관심이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채널 자체가 서버 오류로 잠깐 꺼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사흘이 지나서야 알아챈 것도 어쩌면 시청자가 0명이라는 방증이었다. 오류를 신고해준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던전 벽에 걸린 등불이 붉은빛을 흐릿하게 흩뿌리는 복도를 지나며, 나는 이 세계의 배신자들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배신자'라는 말은 인류가 함께 싸워야 할 던전을 혼자 독차지해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향한 멸칭이었다는데, 지금은 그저 하나의 방송 장르요 직업명이 되어버렸다. 시청자들은 배신자들이 홀로 위험을 감수하며 화려하게 던전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구경거리로 즐기고, 배신자들은 그 시선을 자본으로 바꿔 살아간다. 상위권 배신자들은 후원 하나로 저택을 사고, 전용 대장장이를 고용하고, 심지어 던전 공략권을 사재기해서 방송용으로 독점하기도 한다던데—나는 그 화려한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 그야말로 시청자 명단의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위치에서 매일 드레스를 갈아입고 슬라임을 썰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그 구조 안에서 귀족 영화 속 백작 부인처럼 굴기로 했는데, 어릴 적 낡은 VOD 사이트에서 봤던 어느 고전 영화의 여주인공이 너무나 근사해서였다. 오래되어 화질도 흐릿한 그 영상 속에서, 백작 부인은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도 찻잔을 놓지 않았고, 하녀에게 무례한 말을 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아함, 절제, 여유. 그 세 가지를 삶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확실히 이 던전은 어울리지 않는 무대였지만, 적어도 나 혼자만은 그 배역에 충실하기로 했다. 복도 끝에서 마주친 고블린 무리를 향해 리본을 휘두르며 몸을 회전시키자, 드레스 자락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가 다시 접혔다. 고블린 다섯 마리가 원형으로 나를 포위하려 들었지만, 포위망이라는 건 애초에 상대가 도망칠 생각이 없을 때나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리본을 채찍처럼 늘여 가장 왼쪽의 고블린 목을 휘감아 끌어당긴 뒤, 그 반동을 이용해 옆의 두 마리를 동시에 쳐냈다. 남은 두 마리가 창을 들고 달려들자, 나는 치맛단을 한 손으로 살짝 걷어 올리며 반보 물러선 다음, 리본을 짧게 끊어 치듯 휘둘러 정수리를 정확히 갈랐다. 고블린 다섯이 동시에 쓰러지는 장면은 분명 근사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나는 마지막 고블린의 정수리를 정확히 내려찍은 뒤 숨을 고르며, 이번에도 영석을 확인했다. [현재 시청자: 0명.] 역시나였다. 나는 픽 웃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정도면 기네스에 올라도 되지 않을까. 무반응 부문 세계 기록 갱신, 백조 채널.' 던전 1층 공략을 마치고 귀환석 위에 올라서기 직전, 나는 문득 어제 검색했던 랭킹 게시판을 떠올렸다. 상위권은 온통 화려한 이름들로 가득했는데, 후원 총액과 실시간 시청자 수가 나란히 표시된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다른 세계의 뉴스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혈아(血牙)'라는 이름이 유독 눈에 밟혔다. 흑호(黑虎) 클랜 소속의 최강급 젊은 배신자, 조회수와 후원 모두 압도적이라던 그 이름 옆에는 최근 들어 순위가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자막이 붙어 있었다. 게시판 댓글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혈아가 부상을 당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클랜 내부 갈등설을 제기했다. 나야 그런 경쟁 구도에는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저런 화려한 무대를 밟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 않았다. 시청자 0명과 후원 총액 0원의 세계에 익숙해진 나에게, 저 숫자들은 거의 신화처럼 느껴졌다. 귀환석의 빛이 발밑을 감싸며 몸을 끌어올리는 순간, 나는 다음 목표를 정했다. 소문으로는 흑호 클랜이 최근 '칠흑의 하층'이라는 위험 구역을 공략하러 대거 이동했다고 하는데, 그곳이라면 뭔가 흥미로운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위험도가 높을수록 시청자의 관심도 커진다는 건 이 업계의 불변의 법칙이었으니까. 물론 위험도가 높을수록 나 자신이 갈릴 확률도 높아진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드레스 세탁비를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였다. 빛이 사그라들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던전 입구의 대기실에 서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조명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벽 곳곳에는 각 던전의 공략 순위와 위험도를 표시하는 발광 문양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벽에 붙은 공고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칠흑의 하층 진입 제한: 상위 랭커 및 클랜 단체 우선'이라는 문구였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는 진입 자격을 심사하는 절차와, 개인 배신자의 단독 진입이 원칙적으로 불가하다는 조항이 덧붙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잠시 턱을 매만졌다. 원칙이 있다는 건, 그 원칙을 비껴갈 방법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우아하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파고들 방법은 늘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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