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화염 마녀는 부업 중

4화

"네, 맞아요." 숨길 방법이 없었다. 윤소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하철 형광등 아래에서도 그 눈빛만은 유독 밝았다. "저도 탐사자예요! 주말마다." 그녀가 흔들던 가방에서 F등급 카드를 꺼내 보였다. 같은 등급이었다. 카드 색깔도 똑같았다, 회색 테두리에 하얀 바탕. "저 낮엔 매장에서 일하는데, 사실 꿈은 탐사로 돈 모아서 브랜드 하나 차리는 거예요." 말이 빠르고 발랄했다. 혼자 다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음 말을 이어붙였다. "패션 쪽으로요. 요즘 던전에서 나오는 소재들 있잖아요, 그거로 옷 만들면 완전 대박일 것 같은데. 근데 자본이 없어서, 그래서 탐사부터 시작한 거예요." 혼자 사업계획서를 읊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아까 지부에서 나오시는 거 봤어요. 처음이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카드 번호가 최근 발급이잖아요." 번호까지 확인하는 열정이라니. 조금 무서웠다. 이 사람, 지나가는 사람 카드 번호까지 스캔하고 다니는 건가. "저기 혹시."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까지의 속사포 같던 말투가 갑자기 느려졌다. "길잡이 필요하세요? 저 이 근처 초심자 던전 지도 다 외웠거든요." 타이밍이 너무 좋아서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접수원도 길잡이 구하라고 했고, 내가 아는 길잡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아린으로 산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인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좋아. 어차피 필요했던 거다.' "조건이 뭔데요." 최대한 계산적으로 물었다. 협상은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게 원래 내 몸으로 살 때 배운 유일한 사회생활 지식이었다. "수익 3대 7이요. 제가 3, 언니가 7." 언니. 호칭이 낯설었지만 이 몸으로는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 서른 넘게 살면서 누군가에게 언니라고 불려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 남자였으니까. "안내랑 함정 탐지, 몬스터 정보는 제가 다 해요. 전투는 언니가 하시는 거고."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전투를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전제하에. 실제로 잘하는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3대 7이면 초심자 던전 몇 번만 돌아도 감가상각 이상은 뽑는다. 장비값, 시간값, 정보값을 다 따져도 손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남는 장사였다. 길잡이 없이 혼자 들어갔다가 함정에 발목 잘리는 것보다는. "좋아요." "진짜요? 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했다. 손이 작고 따뜻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게 뭐라고 안심이 되나.' 그러고 보니 몸을 바꾼 이후로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서 손을 맞대본 게 처음이었다. 남의 손인데, 내 손처럼 반응했다. 체온까지 다르게 느껴졌다. "근데 언니 이름이 뭐예요?" "...설아린이에요."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어색했다. 내 이름이 아닌데 내 이름처럼 말해야 했다. 혀가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예쁜 이름이다." 윤소라가 웃었다. 칭찬을 받는 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이건 내 얼굴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까지 느껴졌다. 설아린의 몸은 부끄러움도 잘 타는 모양이었다. "주말에 시간 되세요? 토요일 아침에 만나서 인천 앞바다 던전 가요." "네, 좋아요." "거기 초심자용으로 유명해요. 몬스터도 약하고, 입구도 가까워서. 제가 지도로만 세 번은 갔다 왔어요." 지도로만 갔다 왔다는 게 무슨 소린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넘겼다. 아마 시뮬레이션이나 남이 찍은 영상 같은 걸 뜻하는 거겠지. 약속을 잡고 그녀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거 진짜 되는 건가. 무직 백수가 하루 만에 여자 아바타로 길드 등록하고 길잡이까지 구했다. 말이 안 되는데 되고 있었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창문에 비친 얼굴을 봤다. 설아린의 얼굴이었다. 내가 짓는 표정인데 낯설었다. 눈을 찡그려봤다, 창문 속 여자도 똑같이 찡그렸다. 당연한 건데도 매번 새삼스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현신을 해제했다. 원래 몸으로 눈을 떴다. 천장이 익숙했다. 손을 들어봤다, 이번엔 진짜 내 손이었다. 손가락이 두껍고 마디가 거칠었다. 그제야 뭔가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허리에서 소리가 났다. 스물여덟 살인데 벌써 이런 소리가 나면 안 되는데.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 반쯤 남은 김치, 그게 다였다. 한숨이 나왔다. 장을 봐야 하는데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라면이 답이었다. 라면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카드를 다시 확인했다. [탐사자 등급: F] [레벨: 1] 레벨 1이라는 숫자가 유독 초라해 보였다. 근데 뭐, 어제까지 탐사자도 아니었으니 이것도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계속 그 숫자를 봤다. 언젠가는 이 숫자가 올라가겠지. 얼마나 걸릴지는 몰랐다. 토요일까지 사흘 남았다. 그동안 뭘 해야 할까. 장비를 사야 하나. 설아린은 지금 후드티 하나로 던전을 뛸 판이었다. 인터넷에서 초심자 장비를 찾아봤다. 방어구, 무기, 신발. 가격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통장에 십사만 원 있는데 방어구 하나가 삼십만 원이었다. '이건 뭐, 던전 들어가기 전에 파산하겠네.'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계속 가격표를 봤다. 초심자용이라고 써놓고 가격은 하나도 초심자용이 아니었다. 장갑 하나가 오만 원, 신발이 십오만 원. 이 바닥은 원래 이런 건가. 하지만 곧 깨달았다. 설아린은 화염술사고, 근접 무기가 별로 필요없었다. 방어구도 최소한만 있으면 됐다, 원래 스킬 자체가 사기였으니까. 소파를 태워먹었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손끝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던 감각, 소파 등받이가 순식간에 숯이 되던 소리. 그 정도 화력이면 방어구보다 컨트롤이 문제였다. 맞기 전에 태워버리면 되니까. 돈 대신 시간을 아꼈다. 토요일까지 몸을 조종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집안에서, 조심스럽게. 소파는 이미 하나 태워먹었으니 이번엔 진짜 조심해야 했다. 현신을 다시 켰다. 설아린의 몸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손끝에 아주 작은 불씨만 만들어보려 애썼다. 처음엔 아무것도 안 나왔다. 두 번째엔 손바닥 전체가 뜨거워지더니 순식간에 화염이 확 터졌다. 놀라서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것도 안 태웠다. 벽지가 살짝 눌은 정도였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반복하면서 조금씩 감을 잡아갔다. 불씨의 크기를 줄이는 게, 늘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출력 조절이 이렇게 안 되는 스킬이었나.' 밤이 깊었다. 라면 국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이 몸, 이 능력, 이 상황. 전부 다 어이가 없는데. 그런데 묘하게, 아주 조금, 기대가 됐다. 벽지에 눌은 자국을 보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소파에 이어 벽지까지. 이러다 이 집 자체가 남아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남는 감정은 씁쓸함이 아니었다. 뭔가, 처음으로 뭔가를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직으로 삼 년을 흘려보낸 뒤에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토요일이 오면 인천 앞바다 던전으로 간다. 윤소라가 안내하고 나는 싸운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 단순한 계획이 자꾸 머릿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잘 될까. 못 하면 어떻게 되나. 설아린의 몸이 다치면 그건 누구의 몸이 다치는 걸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은 토요일에 던전 안에서 나올 거였다. 직접 부딪혀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라면 냄비를 씻어놓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손끝에 다시 작은 불씨를 켰다. 방 안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이 불씨가, 사흘 뒤엔 몬스터를 태울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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