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화염 마녀는 부업 중

3화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등록을 하자. 무슨 방법을 써서든.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어제 겪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재생됐다. 설아린의 몸으로 깨어난 것, 손목에 새겨진 낙인 같은 스킬창,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계에서 '존재 증명'이 안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 서류상 나는 유령이었다. 유령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도 못 산다. 신분증이 없으니까. '좋아.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인터넷을 뒤졌다. 〈탐사자 등록 절차 안내〉 〈신원 미확인자 등록 - 예외 조항 3조 2항〉 〈던전 유래 존재의 사회 편입에 관한 가이드라인〉 〈현신 계열 스킬 보유자 등록 사례 모음〉 마지막 게시글을 클릭했다가 조회수 3에 댓글이 0개인 걸 보고 바로 닫았다. 아무도 관심 없는 케이스라는 뜻이었다. 나 같은 걸 정상적인 사례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예외 조항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세상엔 원래 나 같은 변수가 종종 있었나 보다. 관리국도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예상하고 조항을 만들어놨을 리는 없고, 아마 누군가가 먼저 이 짓을 하다가 걸렸겠지. 선례가 있다는 건 좋은 거였다. 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범죄자 취급은 안 받는다는 뜻이니까. [3조 2항] 던전 유래 존재 또는 특수 계약 소환체는 관리국 발급 임시 식별코드로 대체 등록이 가능하다. 단, 소환자 본인의 신원 확인이 필수다. 소환자 본인. 그게 나였다. 어쨌든 서류상 나는 소환자고 설아린은 소환체였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세상 이치가 원래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나로선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반박할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다. '김태현이 소환자다.' '설아린이 소환체다.' 두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이상했다. 내가 나를 소환했다는 뜻인데, 이게 논리적으로 성립하는 건지 아니면 시스템이 그냥 편의상 봐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통과되면 그게 정답이었다. 인천지부로 향했다. 설아린의 몸으로.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당연했다. 금발 벽안의 여자가 평범한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옷을 고를 때만 해도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걸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옷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후드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려는 용도였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후드를 눌러쓴 외국인 미녀라는 조합이 더 시선을 끌었다. 옆자리 남학생은 스마트폰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보다가, 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쯤 눈이 마주쳤다. 남학생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학생. 나도 이 얼굴로 살아본 지 이틀째다.' 지부 건물은 생각보다 컸다. 유리로 된 로비, 안내판, 대기줄. 벽면에는 [탐사자 등록 캠페인 - 이번 달 신규 등록 시 초심자 키트 지급]이라는 배너가 걸려 있었다. 초심자 키트가 뭔지는 몰랐지만 공짜로 준다는 말에 살짝 마음이 동했다. 몸이 이 지경인데 물욕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게 좀 우스웠다. 대기줄에 서서 번호표를 뽑았다. 47번. 앞에 열두 명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나를 흘긋거렸다. 개중 몇몇은 대놓고 사진을 찍으려다가 관리 직원의 제지를 받고 슬그머니 폰을 내렸다. '유명 인사가 된 기분이군.' 기분 좋은 종류의 유명세는 아니었다. 접수처에 앉은 여자가 나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프로답게 웃었다. "등록하러 오셨나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접수원이었다. 명찰에는 '고은지'라고 써 있었다. "네." 최대한 낮고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이 목소리는 원래 그런 톤이 잘 나왔다. 좋은 점이었다. 설아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해서 어떤 말을 해도 신뢰감 있게 들렸다. 내 원래 목소리로는 이런 상황에서 분명 떨렸을 텐데. "신원 확인 먼저 진행할게요. 소환자 본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소환자는... 접니다."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문장 자체가 어색했다. 접수원은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별말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아마 이런 애매한 답변을 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명씩 오는 모양이었다. "소환 계약서와 본체 정보를 여기에." 계약서. 그런 게 있었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계약서를 써본 적도 없는데 무슨 서류를 내라는 건지. 설마 이 자리에서 뭘 새로 작성해야 하나 싶어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아바타 스킬: 현신]을 다시 확인해봤다. 계약서 항목은 시스템이 자동으로 생성해준다는 문구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서류 위에 손을 올리자 저절로 글자가 채워졌다. 펜을 든 것도 아닌데 잉크가 스스로 번져나가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소름 돋았다. 접수원은 익숙한 듯 무심하게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런 걸 매일 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소환자: 김태현 소환체: 설아린 계약 유형: 완전 동기화형 지속 기간: 무제한 무제한이라는 글자를 보고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시간 제한 때문에 던전 안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시간제한이 걸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던전 한복판에서 갑자기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김태현이라는 이름 없는 존재가 몬스터들 사이에 덩그러니 남는 셈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접수원은 서류를 훑어보다가 잠깐 멈췄다. "완전 동기화형은 흔하지 않은데요." "그런가요?" "보통은 부분 동기화라 시간제한이 있거든요. 이건... 특이하네요." 특이하다는 말이 반갑지 않았다. 특이하다는 건 눈에 띈다는 뜻이었다. 눈에 띄면 안 됐다. "문제가 되나요?" "아뇨, 등록엔 문제없어요. 그냥 드문 케이스라서요." 접수원이 서류를 다시 한번 읽는 동안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시스템이 나를 이상한 존재로 분류해서 어딘가에 보고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관리국 데이터베이스에 '특이 케이스'라는 태그가 붙는 순간부터는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도장을 찍고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임시 식별코드가 적힌 플라스틱 카드였다. [탐사자 등급: F] [레벨: 1] F등급. 최하위 등급이었다. 어쩐지 억울했다. 내 잠재능력이 SSS인데. 시스템 창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압도적인 숫자가 떠올랐다. 세상이 뒤집힐 잠재력이라는 문구도 함께. 근데 지금 손에 든 카드에는 F라는 알파벳 하나만 덜렁 적혀 있었다. 이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잠재력이 SSS면 뭐 하나. 등급은 F인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접수원은 내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챈 듯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등급은 실적으로 올리는 거예요. 처음엔 다 F로 시작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첫 던전은 초심자용으로 신청하시는 게 좋아요. 인천 앞바다에 F등급용 소형 던전이 몇 개 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적으로 올린다는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 적어도 영원히 F로 남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서류를 챙기고 나가려는데 접수원이 한마디 덧붙였다. "혼자 다니시는 거예요?" "네." "위험해요. 처음엔 길잡이 구하세요. 길드 게시판에 공고 많이 올라와요." 길잡이. 돈이 또 나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죽는 것보단 나았다. 한 번 죽어봤으니 그 감각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죽는 순간의 그 서늘한 감각만큼은 몸 어딘가에 새겨진 것처럼 선명했다. 다시는 그런 걸 겪고 싶지 않았다. 설아린의 몸이라고 해서 안전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길드 게시판은 어디서 봐요?" "1층 로비에 있어요. 나가시면서 보시면 돼요." 건물을 나와 로비 게시판을 살펴봤다. 온갖 공고가 붙어 있었다. 〈F등급 초심자 환영, 길잡이 구함〉, 〈B등급 파티원 급구, 안정성 우선〉, 〈장기 계약 가능한 탐사자 찾습니다〉. 종이 사이사이 QR코드가 붙어 있어서 스캔하면 상세 조건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몇 개를 스캔해봤지만 조건이 죄다 애매했다. 급하지 않으니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다시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많았다. 밀리고 밀려서 한쪽 구석에 몰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후드를 더 눌러써봤지만 밀착된 몸들 사이에서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누군가의 가방끈이 어깨를 짓눌렀고, 반대쪽에서는 우산 손잡이가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 와중에도 몇몇 시선이 계속 이쪽을 향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발을 밟았다. "어, 죄송해요!" 돌아보니 20대 초반쯤 여자였다. 밝은 색 머리, 캐주얼한 옷차림. 낮에 어디선가 본 얼굴 같았다. "어? 저기, 혹시 속옷 매장..." 그녀가 먼저 알아봤다. 맞다, 며칠 전 새 옷을 사러 갔다가 마주쳤던 그 점원이었다. 그날 사이즈를 재준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스쳤다. 하필 이런 데서 다시 마주치나. "아, 네." 어색하게 대답했다. "우와, 이렇게 또 만나네요! 저 윤소라예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이름이 윤소라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매장에서는 그냥 명찰을 못 봤거나, 아니면 그때는 이름을 물어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저 오늘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손님도 이 방향 사세요?" "아,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대충 둘러댔다. 지하철에서 자꾸 개인적인 질문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손에 그거, 탐사자 카드예요?" 내 손에 든 카드를 그녀가 콕 짚었다. 숨길 틈도 없이 딱 걸렸다. 카드를 숨기려고 손을 뒤로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윤소라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저 표정, 뭔가 캐물으려는 표정이었다. "헐, 진짜네요! 등급이 뭐예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인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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