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쿵쿵쿵쿵-
땅이 흔들렸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울렸다. 생각할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튕겨 옆으로 굴렀다.
퍽.
등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동시에 시야 한쪽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마수가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밀고 지나갔다. 몸통 옆면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부러졌다.
뿌지직.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아예 밑동째 꺾이는 소리였다. 저게 사람이었으면 그냥 끝이었을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나는 굴러떨어진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정확히는 부러진 나무의 잔가지 중 그나마 길고 단단해 보이는 걸 골랐다. 창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물건이었지만, 지금 내가 쥘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한 번만 찔러보자.'
머릿속이 하얬다. 그런데도 몸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수의 정면은 위험하다, 측면 앞다리 관절 쪽이 그나마 약할 거다, 하는 얕은 지식이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뉴스에서, 혹은 술자리에서 누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을 거다.
마수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몸집이 도는 것치고는 너무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뾰족한 나뭇가지 끝을 마수의 앞다리 쪽으로 찔러 넣었다.
팅.
소리가 이상했다.
칼로 살을 찌를 때 나는 소리도 아니고, 나무 막대기가 살가죽에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나뭇가지가 마수의 몸에 닿는 순간, 마치 유리에 튕긴 것처럼 미끄러졌다.
손목이 얼얼했다.
'뭐야.'
잘못 찔렀나 싶어서 자세를 바꿨다. 이번엔 좀 더 힘을 실었다. 어깨까지 써서 밀어붙였다.
팅. 팅.
똑같았다. 나뭇가지 끝이 마수의 몸통에 파고들지 못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나뭇가지 끝이 오히려 조금씩 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숨을 고르고 마수의 몸을 다시 봤다. 자세히 보니 마수 주위로 아주 옅은, 물결 같은 막이 눈에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빛이었다. 마수가 숨을 쉴 때마다, 혹은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그 막이 살짝 어긋나며 빛을 튕겨냈다.
'저게 뭐야. 보이지 않는 막?'
순간 뉴스에서 들었던 단어가 떠올랐다.
'바리어.'
마수도 바리어를 두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들은 적은 있었다. 다만 그건 '상급 마수'에게만 있는 특징이라고 했다. 방송에서 헌터들이 인터뷰할 때 몇 번 언급했던 단어였다. 상급 마수는 특유의 방어막을 두르고 있어서 일반 무기로는 상처조차 낼 수 없다고, 그래서 헌터들도 등급이 높아야 상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돼지 마수는, 딱 봐도 상급이라고 부를 만한 위압감은 없었다. 등급 낮은 마수들 특유의 굼뜬 움직임, 단순한 공격 패턴. 그냥 크고 힘 센 돼지였다. 몸집만 좀 컸다 뿐, 뿔도 없고 날개도 없고 특별해 보이는 부위도 없었다.
'근데 왜 안 통해.'
혼란스러웠다. 이게 등급 낮은 마수라면 이런 막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자체가 잘못된 걸까.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번엔 근처에 떨어진 돌을 집어 던졌다. 주먹만 한 돌이었다. 나뭇가지보다는 그래도 뭔가 더 될 거란 기대가 있었다.
돌은 마수의 몸에 닿기 직전 그대로 튕겨 나갔다.
타앙.
마치 방탄유리에 부딪힌 것 같은 소리였다. 돌이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치 그 자리에 투명한 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손이 떨렸다. 이 순간 처음으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낫도 아니고 곡괭이도 아니고, 그냥 나뭇가지와 돌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무섭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무기가 딱 그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수는 이미 나를 향해 다시 몸을 틀고 있었다.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육중한 몸이 방향을 잡는 그 잠깐의 틈에도 나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도망친다, 무조건.
나는 나뭇가지를 버리고 다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찼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허벅지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쿵.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찍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도망치는 속도보다 그 소리가 가까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개울, 개울로.'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이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렸던 방향, 마수가 물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기억을 붙잡고 나는 방향을 잡고 달렸다. 물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폐가 산소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요구하는 것처럼 아팠다. 눈앞이 흔들렸다.
순간 발밑이 갈라진 나무뿌리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털썩.
턱이 흙바닥에 부딪혔다. 입 안에서 피맛이 났다. 짓씹은 혀 안쪽에서 비릿한 맛이 번졌다.
'일어나야 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잔뜩 박힌 잔돌들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일어나려고 힘을 줬다.
뒤를 돌아봤다.
마수가 바로 뒤, 세 발자국 거리에서 멈춰 있었다. 노란 눈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에는 분노도, 흥분도 없었다. 그냥 나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안 덤벼.'
이상했다. 여기까지 쫓아왔으면 그대로 밀어붙일 줄 알았는데, 마수는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마수가 코를 벌리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꾸이이이--
울음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낮고 기계적이었다. 짐승의 소리라기보다는 어떤 기계 장치가 웅웅거리는 소리에 더 가까웠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싹한 느낌이 훑고 지나갔다. 팔에 난 잔털이 전부 곤두섰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뒤로 밀었다. 손바닥으로 흙을 짚고 조금씩, 정말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급하게 움직이면 그대로 덤벼들 것 같았다.
마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여유롭게. 발굽 하나조차 미동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쫓아올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저 막, 저게 문제야.'
이 상황에서도 머리는 계속 돌아갔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감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마수의 몸을 다시 살폈다. 자세히 보니 그 옅은 막은 마수가 움직일 때마다 아주 살짝 일렁였다. 마치 물 위에 뜬 기름막처럼. 빛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느냐에 따라 그 막의 경계가 아주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저게 안 뚫리면 어떤 무기도 소용없어.'
낫이든, 곡괭이든, 다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나뭇가지와 돌로 확인한 결과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도구가 없는 게 아니라, 도구 자체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저 막을 뚫을 방법이 없다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럼 대체 뭘로 저걸 뚫을 수 있다는 거지. 헌터들이 쓰는 특수한 무기가 있다고 했었나. 아니면 능력 자체가 필요한 건가. 생각이 갈래를 치는 사이에도 눈은 마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마수가 다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쿵.
땅이 흔들렸다.
그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등줄기까지 퍼졌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