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네 놈이구나. 그 향기, 낮이 익도다.]
괴물이 말을 했다. 그것도 정중앙에서 나를 정확히 겨눠서. 나는 그 순간 온갖 계산을 다 접어두고 딱 하나만 생각했다. 이거 도망 못 친다.
발밑의 흙이 떨렸다. 놈의 발굽이 땅을 긁는 소리만으로 광장 전체가 울렸다. 다른 미노타우로스들은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다. 마치 자기 왕이 사냥하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것처럼.
"영감, 얘가 나 아는 눈친데."
'모를 리가 있느냐. 네가 지금 온몸으로 마력을 뿜어대고 있는데.'
"그거랑 나 아는 척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저놈은 던전의 우두머리다. 던전 안의 이물질을 감지하는 게 본업이지. 네 몸 속의 나를 느낀 게야.'
이물질이라니. 참 재밌는 표현이었다. 자기가 내 몸 안에 들어앉은 주제에 남을 이물질이라 부르는 이 영감의 뻔뻔함에 새삼 감탄할 뻔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을 시간도 없었다. 우두머리 미노타우로스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속도가 다른 놈들과 완전히 달랐다. 잔상이 두 개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검을 세워서 정면으로 받았는데,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그대로 뒤로 십 미터는 날아갔다. 등이 광장 벽에 부딪히면서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하얘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갈비뼈 한두 개는 나갔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 걸 확인하는 사이에 두 번째 공격이 오면 그때는 진짜로 끝이었다.
렌즈 화면이 순간 흔들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댓글창은 폭주하고 있었다.
"헌터왕: 야 저거 뭐야 저 미노타우로스 왜 말을 함"
"ㅁㅁ: 저거 던전 보스급인데?? D등급에 저게 왜 있어"
"ㅇㅇ: 도훈아 살아있냐 대답해봐"
"헌터왕: 얘들아 지금 그냥 지켜만 볼 거야? 지금 안 도와주면 진짜 죽을 것 같은데"
"ㅁㅁ: 근데 우리가 개입하면 그거 위법 아니냐 헌터관리국 감청 걸리면 어쩌게"
"ㅇㅇ: 지금 사람 죽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코에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닦자 붉은 피가 묻었다. 세 번째로 마력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이 이미 몸이 한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하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딱 좋은 타이밍에 죽기 직전의 몸 상태를 알려주는 이 시스템, 참 친절하기도 하지.
"영감, 뭐라도 방법 있어?"
'내 힘을 쓸 생각이 이제야 드느냐.'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내 힘을 쓰려면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줘야겠구나만...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조건은 나중에 논하자꾸나.'
영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능글맞은 게 아니라 진짜로 급했다. 이 영감이 이렇게 말하는 걸 나는 반년 만에 처음 들었다. 항상 여유 있게 나를 놀리던 목소리가, 지금은 문장 끝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우두머리가 다시 달려왔다. 나는 이번엔 정면으로 받지 않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뿔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바람이 옷깃을 찢었다. 아슬아슬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굴러서 일어나는 사이 무릎이 돌바닥에 긁혀 피가 배어 나왔다. 통증은 나중에 느끼기로 했다. 지금 느낄 시간이 없었다.
댓글창에서 갑자기 익숙한 아이디가 연달아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던전갤에서 나를 삼 년 훈련시킨 핵심 인원, 다들 '수련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수련부장: 도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해. 검을 세워서 놈의 왼쪽 뿔 아래를 노려. 거기가 약점이다."
"수련부장: 3년 동안 배운 마검류 3식, 그거 실전에서 딸 한 번도 안 썼지. 지금 써야 한다."
"수련부장: 대가는 나중에 걸리고 지금은 살아야지. 안 그러면 다 소용없다."
"헌터왕: 야 지금 그거 알려주는 게 맞냐, 우리가 개입하는 거잖아"
"수련부장: 지금 그딴 소리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삼 년을 키운 애가 저기서 죽게 놔둘 거냐"
"ㅁㅁ: 근데 저거 마검류 3식 원래 출처가 그 금서 아니었냐? 그거 쓰면 걸린다는 말 있지 않았나"
"수련부장: 걸리면 그건 그때 문제고 지금은 살리는 게 먼저다"
방관할지 개입할지 갑론을박하던 그 긴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던전갤이 결단을 내렸다. 도와주기로.
솔직히 그 순간 감동보다는 계산이 먼저 들었다. 저 인간들, 지금 나 살리려고 자기들도 위험 감수하는 거구나. 헌터관리국이 이 생중계를 역추적해서 금지 검술 유포 혐의로 채널 전체를 조지면, 그 책임은 다 저쪽이 지는 거였다. 나는 그냥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쪽이고.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살고 나서 하기로 했다.
나는 수련부장이 알려준 대로 검을 왼쪽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마검류 삼식. 배우긴 배웠지만 실전에서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기술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정식으로 허가된 검술이 아니었다. 삼 년 전, 던전갤의 한 유저가 폐급 헌터관리국 자료실에서 빼낸 금서에 실려 있던 검술이었다. 쓰면 마력 소모가 극심하고, 관리국이 이 검술 패턴을 탐지하면 즉시 '금지 마법 사용자'로 등록되어 추적당한다. 지금까지 안 썼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훈련장에서 이 검술 자세만 잡아봤을 때도 손목이 시큰거렸었다. 실전에서,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쓰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검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아까와 다르게 칼날 전체가 검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지 아닌지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한여름에 가까운 던전 안 온도에서 입김이 나온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그 생각을 할 정신조차 없었다.
우두머리가 세 번째로 달려들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왼쪽 뿔 아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거리가 좁혀지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놈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는 것도 보였고,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도 느껴졌다. 이대로 맞으면 죽는다는 확신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런데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거두면 더 확실하게 죽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칼날이 놈의 목덜미 아래를 파고들었다.
[재밌구나, 인간. 그 검, 봉인된 것이 아니더냐.]
우두머리가 웃었다. 진짜로 웃었다. 상처를 입은 놈이 웃는 게 아니라,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두머리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밀도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광장 전체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놈이 지금까지 진짜 힘을 다 보여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소리였다.
댓글창은 순간 조용해졌다. 폭주하던 글자들이 뚝 끊겼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 위의 드론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정면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 화면은, 이미 수십만 명이 지켜보고 있는 설화 채널 생중계로 그대로 송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