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줏빛 두개골의 소년

4화

그림자들이 산 아래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청연문의 마당에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부서진 담장 틈으로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고, 마당에 어지럽게 흩어진 검흔 위로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검붉게 굳어가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문도들은 저마다 무기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목상현은 어깨의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 마루에 앉았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옷깃을 적셨으나, 그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설아령이 서둘러 약초함을 들고 나와 그의 상처를 살폈다. 그녀의 손끝이 상처 주변을 눌러가며 진맥하듯 살폈다. "뼈까지 닿았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곧 곪을 겁니다." 목상현의 어깨는 이미 검푸르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설아령은 입술을 깨물며 상처를 벌려 안쪽을 확인했다. "살이 뒤틀렸습니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엔 더 아프실 겁니다." "...부인 마음대로 하시오." 목상현이 짧게 답했다. 설아령의 손끝이 상처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으음—" 목상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백지초(白芷草)와 황련(黃連)을 섞어 만든 연고를 상처에 발랐다. 쓰라린 향이 코를 찔렀다. "당귀(當歸)를 달여 드리겠습니다. 기혈이 많이 상하셨을 겁니다." "당귀만으로 되겠소? 검기에 상한 자리는 보통 약재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천마(天麻)와 홍화(紅花)를 더할 겁니다. 기혈을 순환시키고 응혈을 풀어주는 효능이 있으니까요." 설아령은 약초를 헤아리듯 하나씩 손끝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목상현은 그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부인의 손이 검보다 낫구려." "검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만, 이건 낫게 하는 것이니까요." 설아령의 대답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붕대를 감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검을 든 사람은 언제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척을 하지요. 하지만 그 척이 오래가면, 결국 몸이 먼저 무너집니다." 목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붕대가 감기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강규는 문파의 정문 앞에 서서 여전히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뿔피리 소리는 아직도 그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소리는 낮고 길게 울렸고, 마치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산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진동을 담고 있었다. '저 소리가... 그림자를 물러가게 했다.' 그것은 곧 저들에게도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한 요괴나 짐승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이라는 뜻이었다. 강규는 손끝으로 검자루를 매만졌다. 어젯밤 부딪혔던 그림자의 손, 검기를 맨손으로 받아낸 그 손의 감촉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사람의 손이되,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새벽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서서히 걷히고 있었지만, 그 안개가 걷힌다 해도 마음의 안개는 걷히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새벽, 산 초입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처음엔 희미했으나, 점점 가까워지며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청연문의 문도 하나가 황급히 뛰어와 보고했다. "문주님! 낯선 무리가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수는 열이 넘습니다!" 문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규의 얼굴이 굳었다. "또 저들인가?" "아닙니다, 이번엔...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천도문(天刀門)의 깃발입니다!" 강규의 표정이 순간 풀렸다가 다시 복잡해졌다. 천도문은 청하촌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중견 문파였다. 한때 청연문과 교류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서로 소식조차 뜸했다. 강규가 마지막으로 천도문 사람을 본 것은 십 년도 더 전, 어느 문파 회합에서였다. "천도문이 어찌 이 시점에..." 목상현이 어깨의 상처를 감싸며 마루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웠으나,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흘 전, 내가 인편을 보냈네." 강규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목 원로, 언제..." "자네가 문도들을 모으던 그날 밤, 나는 사람을 시켜 천도문과 인근 몇 문파에 소식을 넣었네.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는 것과, 낯선 자들이 산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목상현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리한 것은, 자네의 판단을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네. 다만 이 일이 청연문 하나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지." "그들이 무영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위험을 나눌 수는 있으리라 여겼네." 강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목상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안에는 원로로서의 노회함과, 문파를 향한 진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 결국 강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문 안에서 홀로 버티고 있었을 것이야." 산 초입에서 올라온 무리는 과연 천도문의 인장이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깃발에는 하늘을 가르는 칼 한 자루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천도(天刀)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말발굽 소리가 산길을 타고 울릴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선두에 선 것은 곡천상(谷天祥)이라는 사내였다. 천도문의 부문주로, 나이는 마흔 줄에 접어들었으나 눈빛이 젊은이 못지않게 매서웠다. 어깨가 넓고 체격이 다부졌으며, 허리에 찬 도(刀)의 손잡이는 오래 쓴 흔적으로 반질반질했다. "청연문의 목 노선배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곡천상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낮았으나, 예를 갖춘 말투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목 원로께서 보내신 서신을 받고 즉시 달려왔습니다. 문주께서는 직접 오지 못하시고, 대신 저를 보내셨습니다." 목상현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곡 부문주, 이렇게 신속히 와주니 고맙소." "서신에 적힌 내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들고, 낯선 흑의인들이 산을 감시한다니... 저희 문주께서도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곡천상의 시선이 청연문 마당을 훑었다. 어제 밤의 격돌로 담장 일부가 부서지고, 마당 곳곳에 검흔이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이 담장의 갈라진 틈과 바닥에 남은 그을린 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목상현이 간략히 어젯밤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림자가 나타나 대치하다 결국 물러갔다는 이야기를 듣던 곡천상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검기로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손으로 검기를 막았다니... 그것이 정말 사람이었습니까?" "확신할 수 없소. 하지만 그것은 뿔피리 소리 하나에 물러갔소. 즉, 그 위에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다는 뜻이지." 곡천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천도문에서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당분간 청연문 주변에 진을 치고 경계를 서겠습니다." 강규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곡 부문주, 그 은혜는 잊지 않겠소." "은혜라니요. 무림의 도리(道理)가 그러합니다. 문파 간에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것이 옛 선배들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곡천상의 말투는 예의 발랐으나, 그 눈빛 속에는 다른 것이 어려 있었다. '단순한 상부상조만은 아니겠지.' 목상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천도문이 이토록 신속히, 그리고 대규모로 병력을 보낸 데에는 분명 다른 셈이 있을 터였다. 문파 간의 도리만으로 열 명이 넘는 무사를 백 리 밖에서 이틀 만에 동원한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계산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곡천상은 천도문의 무사 열두 명을 청연문 주변에 배치했다. 담장 바깥과 산길 초입에 각각 초소를 세우고, 밤낮으로 교대하며 경계를 서게 했다. 초소마다 화롯불이 밝혀졌고, 무사들은 조를 나누어 두 시진마다 순찰을 돌았다. 청연문의 문도들은 그제야 조금씩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마당에서 웃음소리가 들렸고, 몇몇은 부서진 담장을 손보기 시작했다. 강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여진과 함께 담장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천도문 사람들, 되게 든든해 보이네." 여진이 중얼거렸다. "저들이 계속 있어주면 좋을 텐데." "확실히 든든하긴 한데..." 강찬은 초소에서 오가는 천도문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마음이 편치가 않아." "왜? 도와주러 왔는데 뭐가 불편해?" "모르겠어. 그냥... 저 사람들이 우릴 도와주는 게, 정말 순수하게 도우려는 것뿐일까 싶어서." 여진이 강찬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에이, 그런 복잡한 생각은 어른들이 할 일이지. 우린 그냥 저 사람들 믿고 편히 지내면 되잖아."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품속의 두개골은 어제보다는 다소 잦아든 빛을 내고 있었으나, 여전히 미약한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박동은 마치 심장처럼 규칙적이었고, 강찬의 손끝으로 은은하게 전해졌다. '저들이 원하는 게 정말 이것이라면... 병력이 는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걸까.' 강찬은 옷깃을 매만지며 품속의 두개골 위치를 확인했다. 여진은 그런 강찬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사흘 후, 산 아래에서 다시 사람이 올라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천도문의 문주가 직접 방문한 것이었다. 이름은 곡백연(谷伯淵), 곡천상의 숙부이자 천도문의 실권자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나,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었으나 그것은 위엄을 위한 장식일 뿐,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필요치 않은 걸음이었다. 눈썹은 눈처럼 희었고, 눈동자만은 젊은이의 것처럼 형형했다. 강규와 목상현이 정문까지 나가 그를 맞이했다. "곡 문주께서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 뜻밖입니다." 곡백연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청연문의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마당 전체에 울리듯 또렷했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담장의 부서진 흔적과 검흔을 유심히 살폈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의 그을린 자국을 톡톡 두드리며,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응시했다. "목 원로의 서신에 적힌 내용, 그리고 천상의 자줏빛... 이는 옛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목상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곡 문주께서도 그 전승을 아십니까?" "천도문에도 오래된 기록이 있습니다. 봉인된 존재에 관한 것이지요. 다만 그것이 이토록 빠르게 다시 세상에 드러날 줄은 몰랐습니다." 곡백연은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저희 문파의 기록에는, 그 존재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 세 가지 조짐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것, 둘은 산 짐승들이 산을 떠나는 것, 셋은 사람의 그림자를 닮은 것들이 밤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목상현과 강규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셋이 이미 모두 나타났습니다." 곡백연이 조용히 덧붙였다. "산 아래 사냥꾼들의 말로는, 지난 열흘간 산짐승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합니다." 마당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곡백연의 시선이 잠시 강규를 향했다. "강 문주, 솔직히 여쭙겠소. 청연문에 그 존재와 관련된 물건이 있습니까?" 강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곡백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없소. 다만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도 알지 못할 뿐이오." 곡백연은 그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노인의 눈빛은 날카로웠으나,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요. 저희 천도문이 당분간 청연문의 경계를 맡겠습니다. 대신..." 그가 잠시 말을 끌었다. 바람이 잠시 멎은 듯, 마당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조용했다. "만약 청연문에 그 존재와 관련된 어떤 것이 발견된다면, 반드시 저희에게도 알려주셔야 합니다. 이는 무림 전체의 안위와 직결된 일이니까요." 강규와 목상현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목상현의 눈빛에는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으나, 동시에 지금은 물러설 수 없다는 무언의 동의도 함께였다. 결국 강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소." 곡백연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 어떤 계산이 숨어 있는지, 강규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곡백연은 몸을 돌려 조카인 곡천상에게 짧게 눈짓했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 그리고... 청연문 안팎을 잘 살피도록 해라." 그 말속에 담긴 함의는, 청연문의 경계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청연문 자체를 감시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목상현은 그 짧은 눈짓을 놓치지 않았고,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그날 밤, 강찬은 자신의 방에서 두개골을 다시 궤짝 깊숙이 밀어 넣었다. 궤짝 뚜껑을 닫는 손길이 조심스러웠고, 그 위에 낡은 천을 겹겹이 덮었다. '천도문에 이걸 알려야 하나...'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이미 없다고 말한 이상, 지금 와서 말을 바꾼다면 문파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었다. 게다가 이 두개골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물건이 어제 나타난 그림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밖으로 천도문 무사들의 초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순찰을 도는 무사들의 그림자를 담장에 길게 늘어뜨렸다. 표면적으로는 위기가 봉합된 듯했다. 하지만 강찬의 마음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궤짝 위에 손을 얹은 채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나무판을 통과해 전해지는 미약한 박동이 여전히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궤짝 안의 두개골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초소의 불빛 하나가 소리 없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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