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줏빛 두개골의 소년

2화

밤이 깊었으나 청연문(靑燕門)의 마당에는 등불 하나 꺼지지 않았다. 바람도 없는 밤이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등롱만이 미약하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늘였다 줄였다 했다. 강규는 검을 쥔 손을 풀지 않은 채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 검병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산 아래 늘어선 검은 그림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강규는 속으로 세어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이나 되는가." 강규가 낮게 물었다. "넷... 아니, 다섯입니다." 문도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히 세어보게. 한 명이라도 놓치면 우리 전부가 위험해질 수 있네." 문도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눈을 부릅뜨고 산 아래를 응시했다. "다섯... 다섯이 맞습니다, 사백님." "다섯이라." 강규가 낮게 되뇌었다. "적은 수는 아니군." 목상현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겪어본 광경을 다시 보는 사람처럼, 눈동자에는 어떤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 '저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림이란 두 가지에서 나온다. 확신, 혹은 여유(餘裕).' 확신이라면, 저들은 청연문의 전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피고 있다는 뜻이다. 여유라면, 저들에게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청연문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문주." 목상현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아무도 재우지 마시게." 강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조를 나누어 담장을 지킨다. 한 시진씩 교대하라." "동편은 세 명, 서편은 세 명. 나머지는 정문 앞에 진(陣)을 이룬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검을 뽑았다 다시 넣었다를 반복했고, 누군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다 오히려 더 굳어버린 얼굴로 서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청연문의 문도들 중, 실전을 겪어본 이는 손에 꼽았다. 대부분이 문파 안에서 초식을 연마하고 목검으로 겨루던 이들이었다. 진짜 피가 흐르는 싸움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소년 하나가 옆의 사형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사형, 저들이 진짜 쳐들어오는 겁니까?" "모르겠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야." 사형이라 불린 자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그 대답이 오히려 소년의 두려움을 더 부풀렸다. 한편 강찬의 방에서는 전혀 다른 사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 틈새로 옅은 자주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찬은 궤짝 앞에 쭈그려 앉아 자주색 두개골을 품에 안고 있었다. 뼈의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주빛이 손끝을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처음 그 두개골을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그저 은은한 빛을 뿜는 기물(奇物)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빛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박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밝아진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하필 오늘, 저들이 나타난 순간에.' 우연이라 하기엔 시기가 너무도 맞아떨어졌다. 산 아래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과, 두개골이 빛을 뿜기 시작한 것. 그 사이에 무언가 연결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강찬은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찬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들어온 것은 여진(余進)이었다. 목상현의 또 다른 제자로, 강찬보다 두 살 위였다. 체구는 크고 눈치는 없되 마음씨는 순박하여 문파 안에서 웃음거리 노릇을 도맡던 사내였다. 그의 어깨는 문틀에 부딪힐 정도로 넓었고, 손에는 아직 잠자리에서 급히 나온 흔적인 듯 이불 자락이 걸려 있었다. 강찬은 화들짝 놀라 두개골을 등 뒤로 숨겼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형!" "아무것도 아닌데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요물이라도 숨겨둔 거냐?" 여진의 눈이 강찬의 등 뒤로 향했다. 자주빛이 그의 어깨 너머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저건 뭐야?!" 여진이 뒷걸음질을 쳤다. 등에 부딪힌 문짝이 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산도깨비다! 산도깨비가 여기 있다!" 강찬은 손을 내저으며 그를 붙잡았다. "조용히 하세요, 사형! 이건... 그냥 돌입니다!" "빛나는 돌이 어디 있어! 그거 요물의 눈알 아니냐? 나 예전에 할머니한테 들었는데, 산속 요괴들은 눈알이 자주색으로 빛난다더라!"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있어! 우리 마을에 옛날에 산도깨비 나온 얘기 있었단 말이다! 눈알이 딱 저런 색이었다더라고!" 강찬은 이마를 짚었다. '하필 이럴 때...' 그는 한숨을 삼켰다. 밖에서는 흑의인들이 대치하고 있는데, 방 안에서는 사형이 요괴 타령을 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형,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뒷산에서 주운 돌인데, 밤에만 좀 빛나는 그런 겁니다." "밤에만 빛나는 돌이 어디 있냐고!" "있습니다! 야명주(夜明珠)라고 들어보셨죠? 그런 종류입니다!" 여진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강찬의 등 뒤를 다시 한번 살피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냐? 진짜 그냥 돌이란 말이지?" "예, 정말입니다. 사형이 놀랄 만한 그런 물건 아닙니다." 강찬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실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두개골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기 때문이다. 마치 뼈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듯, 미약한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규칙적이고 낮은 울림이었다. '설마... 반응하고 있는 건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산 아래 저들과, 이 두개골이...' 그는 두개골을 조금 더 세게 품에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닿는 뼈의 표면이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미열이 느껴질 정도였다. 여진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강찬을 훑어보다가, 결국 어깨를 늘어뜨렸다. "야명주라... 그런 게 있으면 나도 하나 갖고 싶다. 밤에 잘 때 등불 대신 쓰면 딱이겠는데." "예, 예. 사형도 언젠가 하나 구하시면 좋겠네요." 강찬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곧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강찬! 여진! 두 사람 다 이리 나와보게!" 목상현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낮고 무거운, 어딘가 다급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두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다 황급히 방을 나섰다. 강찬은 두개골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궤짝 안에 다시 넣어둘까 고민했으나,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 옷 속에 두개골을 숨긴 채 방문을 나섰다. 옷섶 사이로 여전히 은은한 자주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당에 모인 문도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산 아래를 가리키는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등롱 불빛 아래 모여든 문도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오로지 산 아래 한 지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것 보게." 강규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긴장이 배어 있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었으나, 그 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땅을 짓눌렀다.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가 땅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듯했다. 달빛조차 그 그림자를 완전히 비추지 못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사람의 형상을 빌려 걷는 듯했다. 문도들 사이에서 낮은 술렁임이 일었다. 누군가는 검을 뽑아 들었고, 누군가는 뒷걸음질을 쳤다. "저게 대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그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목상현이 낮게 명령했다. "이건 내가 상대한다." 강규가 그를 돌아보았다. 눈빛에는 놀람과 만류의 뜻이 뒤섞여 있었다. "목 원로, 홀로는..." "홀로가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이 위험해지네." 목상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문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강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류하려던 말이 목구멍 안에서 사라졌다. 강찬은 그 눈빛을 보며 문득 낯선 기시감을 느꼈다. 산으로 떠나기 전날 밤, 스승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때도... 사부님은 무언가를 삼키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삼켜버린 그 순간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 보였다. 그날 밤, 목상현은 강찬을 불러 앞에 앉히고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돌려보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으나, 말할 수 없는 자의 얼굴. 강찬은 옷섶 속 두개골을 무의식적으로 더 세게 움켜쥐었다. 산길을 오르는 그림자는 이제 청연문 정문 앞, 오십 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완전히 멎었다. 소나무 향조차 그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정적 속에서, 문도들의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다. 누군가는 숨을 참았고, 누군가는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검병을 움켜쥐었다. 그림자의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이 미풍에 살짝 흔들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것은 두 개의 눈동자였다. 색이 없었다.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그저 텅 빈 두 개의 구멍 같은 눈이 청연문의 담장 위를 훑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것을 감식하듯 담장 위를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문도들의 얼굴을 훑고, 강규의 검을 훑고, 목상현의 걸음을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정확히, 강찬이 서 있는 자리에서 멈추었다. 강찬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훅 끼쳤다. '저것이... 나를 보고 있다.' 그의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옷섶 속 두개골의 박동과 그의 심장 박동이 어느 순간 겹쳐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품 안의 두개골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을 뿜어냈다. 옷섶 사이로 새어 나온 자주빛이 마당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문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찬에게로 쏠렸다. "저, 저게 뭐야!" 누군가 소리쳤다. 강찬은 다급히 두개골을 감추려 했으나, 이미 빛은 감출 수 없을 만큼 밝아져 있었다. 산 아래, 텅 빈 눈의 그림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 빛에 응답하듯, 그림자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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