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도현 씨, 맞습니까." 정장 사내는 신분증을 거둬들이지도 않은 채 건조하게 물었다. 목소리에 억양이라곤 없었는데, 그 무표정한 태도가 오히려 사람을 더 긴장하게 만드는 종류였다. 아침 7시 반,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강남 뒷골목에서 정장 차림의 사내 둘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정상은 아니었다.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짐짓 여유로운 어조로 답했다. "맞긴 한데, 아침부터 이렇게 신분 확인 나오는 건 좀 과한 거 아닙니까? 나 지명수배범도 아니고." 사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서류철을 펼쳤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전 8시 12분, 강남 게이트 인근에서 미등록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반경 300미터 내 유일한 인간 개체가 귀하였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는데, 10년을 전장에서 살아온 몸이라 마력을 완전히 감출 재간이 없었던 거다. 아스텔라에서는 마력을 숨기는 게 아니라 얼마나 크게 터뜨리느냐가 관건이었으니, 이런 섬세한 은닉술 따위는 배울 필요도 없었다. '들켰군.'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저야말로 그냥 산책 나온 학생인데요. 새벽 공기가 좋아서요."
사내는 서류철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파형 그래프 하나가 요란하게 진동하며 붉은 선으로 치솟아 있었다. 선의 끝자락이 아예 화면 밖으로 튀어나갈 듯 요동치고 있었는데, 저게 정말 내 심박수라면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어야 했다. "이 파형이 산책하는 학생의 심박수라면, 협회 기준으로는 대재해급입니다." 그 무미건조한 한마디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실소를 흘렸다. '이거 은근히 유머 감각이 있네.'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내 손목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내가 도망칠 낌새를 보이면 곧바로 뭔가를 쓸 태세였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협회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대충 상황이 짐작은 갔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나오는 세상이라면, 그걸 관리하는 조직 하나쯤은 당연히 있을 테니까. 나는 결국 순순히 세단에 올랐고, 협회 본부로 이송되는 내내 창밖으로 스쳐 가는 서울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10년 만에 다시 보는 도시인데, 이번엔 감상에 젖을 여유조차 주지 않는구나. 신호등도, 편의점도, 버스 정류장에 붙은 광고판도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도로 곳곳에 낯선 표지판들이 서 있었다. 붉은 원 안에 검은 균열 모양이 그려진 표지판. 아마 게이트 위치를 알리는 표시겠지.
협회 본부는 백색 대리석과 강철 프레임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정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냉기와 소독약 비슷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로비 천장에는 푸른 문양이 새겨진 대형 스크린이 실시간으로 전국 게이트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붉은 점 하나가 서울 강남, 또 하나는 부산, 그리고 낯익은 숫자들이 등급별로 나열돼 있었다. E급부터 S급까지, 나는 그 표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스텔라에서는 이런 걸 등급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불렀는데.' 스크린 하단에는 오늘 하루 접수된 게이트 수와 사망자 통계까지 자그마한 글씨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사망자 숫자가 두 자릿수인 걸 보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이게 일상인 모양이었다. 나를 데려온 사내는 접수처 직원에게 서류를 넘기며 짧게 말했다. "미등록 마력 반응자, 즉시 등급 심사 요청."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에 뭔가를 입력했고, 나는 그 절차가 지나치게 신속하다는 사실에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보통 이런 관공서 일이란 서류 하나 처리하는 데도 한 시간씩 걸리는 법인데, 여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것처럼 손놀림이 매끄러웠다.
심사장은 지하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벽면 숫자가 지하로 갈수록 붉게 물들었는데, 그 색이 마치 경고등 같았다. 문이 열리자 습기와 금속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훅 끼쳐왔다. 원형 경기장처럼 생긴 시험장 중앙에 낡은 소환석이 박혀 있었고 그 주위를 둘러싼 관람석에는 심사관들이 앉아 있었다. 대략 열 명 남짓, 다들 태블릿이나 서류를 손에 쥔 채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몇 번째 심사인지 지겨워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등급 심사 방식은 간단합니다." 안내를 맡은 여성 직원이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목소리에는 억양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수백 번 반복해서 낡아버린 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환석이 임의의 몬스터를 소환합니다. 응시자는 이를 제압하거나 무력화시키면 됩니다. 측정된 마력량과 전투 데이터로 등급이 산출됩니다. 목검을 원하시면 지급해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했다. '아스텔라에서는 이런 식으로 등급을 매겼다간 첫날 다 죽었을 텐데. 소환석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로 목검 하나 들고 싸우라니, 이 세계 사람들은 순진한 건지 대범한 건지.' 나는 직원이 건네는 목검을 받아 쥐며 무게를 가늠해 봤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손에 익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정도 무게 차이로 승패가 갈릴 상대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소환석이 빛나며 3미터짜리 오크가 튀어나왔을 때, 관람석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탄성이 들렸다. 아마 저 정도 크기의 오크가 나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게 놀랄 일이라니, 아스텔라 전장에서는 저런 놈들이 떼로 몰려다녔는데.' 나는 일부러 힘을 절반도 쓰지 않은 채 검을 대신할 목검으로 관절을 끊어 놓았다.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 순간, 관람석은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졌다는 걸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과하게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계산이었는데, 그 계산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관람석에서 심사관 하나가 다급하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 옆에 있던 다른 심사관은 자기 태블릿 화면을 보며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마치 숫자가 잘못 나온 게 아닌지 확인하는 것처럼. 곧이어 안내 직원이 당황한 기색을 억누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의 사무적인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입가가 살짝 굳어 있었다. "강도현 씨, 별도 면담실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걸 느끼며 나는 순순히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나를 힐끔거렸는데, 그 시선들이 하나같이 호기심과 경계심을 반씩 섞은 눈빛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뒷목을 스쳤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방법도 없었다.
면담실 문이 열리자 안쪽에 낯익은 얼굴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는데, 트윈테일로 묶은 머리와 심홍색 도끼가 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10년 전, 아니, 지구 시간으로는 겨우 며칠 전까지 옆집에 살던 얼굴이었다. 저 도끼를 어디서 처음 봤는지, 저 머리를 묶은 방식이 왜 저렇게 익숙한지,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형광등 불빛이 그 실루엣을 비추는 순간, 나는 발을 뗄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