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의 전직 구원자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천장의 색이었다. 누렇게 뜬 벽지, 귀퉁이가 들뜬 형광등 커버, 그 아래 붙어 있는 수능 D-100 스티커까지, 방 안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벽시계는 6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밖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요란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죽었는데 왜 참새 소리가 들리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을 걷어냈는데, 이불에서는 세제 냄새와 함께 아주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그 냄새 하나에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다는 걸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손가락 마디마다 새겨져 있어야 할 검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 걸 보고서야 이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0년간 아스텔라의 전장에서 얻은 상처들, 오른쪽 어깨의 화상, 왼쪽 종아리의 깊은 자상, 심지어 옆구리에 남았던 그 지긋지긋한 마수의 이빨 자국까지, 그 모든 이력이 새하얀 살갗 아래로 지워져 있었다. 나는 팔뚝을 몇 번이나 문질러보고, 손목을 뒤집어보고, 그러다 결국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십 년치 흉터가 하룻밤 사이에 세탁된 기분이라는 게, 웃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서연이 마지막으로 웃으며 했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돌아가, 도현. 이번엔 아무것도 놓치지 마." 그 목소리는 지금도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그 말과 함께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지금 나는 열여덟 살의 몸으로, 수능을 백 일 앞둔 고3의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수학 문제집과, 표지가 반쯤 접힌 채 꽂혀 있는 영어 단어장이 보였다. 저 문제집을 풀어야 할까, 저걸 풀 시간이 나에게 있기는 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다시 새어 나왔다. 욕실로 걸어가 세면대 앞에 서자 거울 속에서 낯선 얼굴이 나를 마주 보았다. 광대뼈 아래 패였던 흉터도, 눈매에 새겨진 피로도 없는, 지나치게 말끔한 열여덟 살짜리 얼굴이었다. 콧대 위에 옅게 남아 있던 화상 자국도, 관자놀이 근처의 흰 머리카락 몇 가닥도, 아무것도 없었다. '10년을 살았는데 이 얼굴로 돌아왔다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뭔가가 가슴 안쪽에서 뒤틀리며 치솟아 올랐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그대로 거울을 향해 내질렀다. 유리가 방사형으로 갈라지며 손등을 파고드는 통증이 뒤늦게 찾아왔는데, 붉은 피가 세면대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이 통증만큼은 진짜였으니까. 깨진 거울 조각 사이로 비친 내 표정은 웃고 있었는데, 그게 더 소름 끼쳤다. 나는 그 표정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결국 손등의 상처를 수돗물로 씻어내며 실소를 흘렸다. 열여덟 살짜리가 아침부터 거울을 부수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정신병원에 신고했을 광경이었다.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자 낡은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두 분은 어느 놀이공원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배경이 어디였는지조차 이제는 가물가물했다. 대학 입학 두 달 전,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두 분이 함께 돌아가셨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는데, 그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나는 곧바로 아스텔라로 소환되었다. 장례식장 향냄새가 채 빠지지도 않은 몸으로 낯선 세계의 제단 위에 떨어졌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10년 동안 세계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사람을, 동료를, 연인을 잃으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이서연도, 묵영도, 마지막까지 함께 웃었던 얼굴들도 전부 그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엔 다르다.' 나는 액자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다짐만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아스텔라는 무너지지 않았을 테니까.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통 몇 개와 우유팩이 있었다. 손이 닿는 대로 우유를 꺼내 마셨는데,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였다는 걸 뒤늦게 확인하고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10년간 마수의 피와 흙탕물을 마셔가며 버틴 몸이었다.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우유 따위가 뭐가 대수겠는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걸터앉으며 TV를 켰다. 아침 뉴스에서 낯익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던전'. 앵커는 서울 외곽 야산에서 세 번째로 자연발생한 게이트에 대해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었고, 화면 아래로는 헌터관리협회의 공식 성명이 자막으로 지나갔다. 등급 미확인, 위험도 낮음, 접근 통제 중. 앵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침착했는데, 나는 그 침착함이야말로 가장 불안한 신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스텔라에서도 처음 균열이 발견됐을 때, 학자들은 하나같이 '위험도 낮음'이라는 말을 반복했었다. 그리고 삼 개월 뒤, 그 낮은 위험도가 왕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나는 그 문구를 보며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는데, 그건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감각이 보내는 경고였다. 아스텔라가 무너지던 마지막 순간, 하늘을 뒤덮었던 균열의 마력 파장과 지금 화면 속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이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던 것이다. 화면 속 게이트는 카메라 너머로도 옅은 유백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빛의 명도와 흔들리는 결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하늘의 균열과 정확히 같은 리듬으로 떨리고 있었다. '설마.' 나는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지구의 던전과 아스텔라의 멸망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라면, 나는 이번에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채널을 몇 번 돌려봤지만 다른 뉴스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할 뿐, 더 깊은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TV를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 근처 공원으로 향한 건 순전히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걸어가는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아침이었는데, 그 맑음이 오히려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아스텔라가 무너지던 날도 하늘은 저렇게 맑았었으니까. 통제선 너머로 희끄무레한 균열이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주위를 노란 폴리스라인과 헌터관리협회 마크가 박힌 드론 두 대가 순찰하고 있었다. 균열의 크기는 어른 두 명 정도가 나란히 서 있을 법한 폭이었고, 가장자리는 마치 유리가 깨지듯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시민 몇몇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지만, 그 누구도 저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게 억울할 정도로 평온한 풍경이었다. 나는 묵영에게 배운 기감을 무심코 펼쳤는데, 그 순간 균열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결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아스텔라를 집어삼켰던 그 붕괴의 감각과 완전히 같은 결이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었고, 동시에 십 년 전 그 순간으로 나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듯한 불쾌한 기시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기감을 더 넓게 펼쳤고, 그 순간 드론 하나가 방향을 틀어 정확히 나를 향해 렌즈를 고정시켰다. '이런.' 뒤늦게 감각을 거둬들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드론에서 붉은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공원 입구 쪽에서 검은 세단 한 대가 사이렌도 없이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세단은 통제선 바로 앞에 멈춰 섰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도망칠까 잠깐 고민했지만, 열여덟 살짜리 몸으로 도망쳐봤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애초에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마력 감지에 걸린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정장 차림의 사내가 나를 향해 무표정하게 신분증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헌터관리협회라는 조직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헌터관리협회 특수조사국 소속입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억양 하나 없이 건조했다. "방금 저 균열 주변에서 마력 파동을 감지했습니다. 본인 소유입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 대신 사내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듯한 목소리,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세단 안쪽의 또 다른 그림자. 이건 단순한 순찰이 아니었다. 이 사내는 뭔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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