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밤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산길을 따라 이도윤이 홀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대운국 관아에서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 몸은 무거웠으나 머릿속만은 이상하게도 또렷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원래 우직하고 순박한 하급 관원이었으나, 언제부턴가 낯선 도시의 기억들—네온사인이 번쩍이던 거리,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 부산이라는 낯선 지명—이 불쑥불쑥 떠올라 스스로도 당황하곤 했으니, 이는 그가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짊어진 자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 기억이 떠올랐을 때는 열병을 앓는 것이라 여겨 의원을 찾아갔으나,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채 홀로 삭이며 살아왔다.
달은 구름 사이로 반쪼가리만 내비치고 있었고, 바람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그의 옷자락을 흔들었는데, 그 서늘함이 유독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관아를 나설 때만 해도 동료 관원 하나가 “오늘은 유독 산길이 조용하니 조심하시게” 하고 지나가는 말로 건넸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흘려들었건만,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말이 이상하게도 목덜미에 걸리는 것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새어드는 달빛이 그의 발밑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였고, 발끝에 걸리는 자갈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때, 나뭇가지 하나가 소리 없이 부러지는 기척이 들려왔다. 이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까마귀 한 마리가 놀란 듯 나무 위에서 날아오르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까마귀의 날갯짓이 어둠을 가르며 멀어지자 산길은 다시 무거운 정적에 잠겼는데, 그 정적이야말로 무엇보다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는 관아에서 배운 대로 허리춤의 목검을 손에 쥐었지만, 그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아니다, 산짐승이겠지” 하고 되뇌었으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쐐액!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바람보다 빠르게 다가들며, 마치 흐르는 물이 다리를 끊어내듯 검을 비스듬히 그어 올렸으니, 이것이 바로 흑사방 사대호법 이지운이 자랑하는 역수검법(逝水劍法) 중 단교잔설(斷橋殘雪)이었다. 이지운은 흑사방 내에서도 냉혹하기로 이름난 인물로,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비명 대신 침묵만이 남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도윤은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검광이 달빛을 삼키듯 번뜩이는가 싶더니, 목검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통증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컥…….”
그는 뒷걸음질치며 무너져 내렸다. 손끝으로 가슴을 짚으니 뜨거운 것이 손바닥을 적셔왔고, 그 온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장면이 동시에 흘러갔다—어린 시절 부친 이학주가 등불 아래서 만권의 서책을 펼쳐 놓고 글을 가르치던 모습과, 낯선 순찰차 안에서 동료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부친의 손끝이 서책의 갈피를 넘기던 소리와, 순찰차의 사이렌이 골목을 울리던 소리가 뒤섞여 귓가에 웅웅거렸으니, 두 삶이 하나의 죽음 앞에서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 두 개의 삶 중 어느 것이 진짜였는지, 아니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생각조차 오래 붙잡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달빛이 순간 구름에 완전히 잠겨 사라졌고, 산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바람이 한차례 거세게 불어와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흐느낌처럼 들려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급히 다가오는 감각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을 구할 손길인지, 끝장을 낼 손길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채로, 그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어둠도, 달빛도, 그 무엇도 답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