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출구를 넘자마자 서울의 축축한 밤공기가 훅 끼쳤다.
골목 안, 낡은 다세대주택 뒤편이었다.
오늘의 균열은 이 근처 반지하 창고에 숨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물웅덩이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희미하게 일렁였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서울의 밤. 방금 전까지 아귀 대가리를 부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밤이었다.
설아가 내 어깨에서 몸을 웅크렸다.
밖으로 나오면 그녀는 남들 눈에 안 보인다.
정확히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본다.
계약자 특전인지 뭔지 몰라도, 덕분에 지하철에서 어깨 위에 요정을 얹고 다녀도 미친놈 취급은 안 받는다.
그건 다행이지만, 대신 나는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까 편의점 앞에서도 그랬다.
설아가 갑자기 "저 삼각김밥 맛있어 보인다"고 속삭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저건 참치마요야"라고 대답했다가,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슬금슬금 거리를 두는 걸 봤다.
인생이 참 고달프다.
"아까 그 손목 얘기 좀 더 해봐."
집으로 걸어가면서 내가 물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스윙 각도가 달랐다고."
"근데 왜 그렇게 잘 부서졌지."
"몰라. 우연 아니야?"
설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손목의 감각을 되짚어 봤다.
스윙 마지막 순간, 손목을 살짝 안쪽으로 꺾었다.
그러자 배트 끝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며 회전력이 더해졌다.
아마추어 야구 선수도 아니고, 회사에서 결재 서류나 넘기던 손목이 그런 걸 기억한다는 게 신기했다.
몸이 먼저 배운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다음 날 밤, 나는 그 동작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봤다.
균열 안, 이번엔 작은 아귀 무리였다.
다섯 마리쯤.
축축한 벽을 타고 흐르는 검은 액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제 맡아도 적응 안 되는 냄새다.
하나를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마지막에 손목을 꺾었다.
딱.
소리부터가 달랐다.
어제보다 훨씬 경쾌하고, 훨씬 파괴적이었다.
아귀의 머리가 단번에 터졌다.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아귀 1마리 처치. DP +14 획득.]
어제 같은 급의 아귀였는데 DP가 더 나왔다.
"이거 봐."
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손목만 꺾어도 데미지가 달라져."
설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다시 해봐."
나는 남은 네 마리를 향해 차례로 배트를 휘둘렀다.
손목 꺾기, 손목 꺾기, 손목 꺾기.
세 번 다 성공했다.
네 번째는 실패했다, 각도가 어긋나서.
배트가 아귀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가면서 힘이 반쯤 흩어졌다.
그래도 죽긴 죽었다.
[아귀 4마리 처치. DP +51 획득.]
총합이 확 늘었다.
어제 같은 마릿수였으면 39 정도였을 텐데.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이거 완전 꿀팁이잖아."
설아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날개 끝이 살짝 파닥거리는 게, 저 아이 나름대로 뭔가 분석 중이라는 신호였다.
"그거, 정확히는 손목 꺾는 타이밍이 문제야. 스윙 궤적 끝에서, 배트 헤드가 목표에 닿기 직전에 힘을 응축시키는 거지."
"오, 전문가시네."
"내가 신관이잖아. 이런 거 좀 안다고."
그녀가 콧대를 세웠다.
작은 몸으로 어깨 위에서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그 모습이 우스웠다.
귀여웠지만 말하지 않았다.
"근데 왜 지금까지 아무도 이 방법 몰랐대?"
"몰라. 원래 인간들이 이런 거 잘 발견 못 해. 감으로 하는 거니까."
"그럼 나 천재네."
"천재는 무슨. 운이 좋았던 거야."
"됐거든."
"진짜야. 너 말고도 이런 거 어쩌다 발견하는 사람 가끔 있어. 근데 대부분 재현을 못 해. 우연히 한 번 하고 끝나."
"근데 나는 재현했잖아."
"그러니까 신기하다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감탄이 섞인 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새로운 요령을 익힌 덕분에 그날 밤 수익은 평소의 배 가까이 늘었다.
[오늘의 총 DP: 89.]
팔만구천 원.
어제보다 훨씬 나았다.
치킨 한 마리 값이 더 나오는 셈이었다.
"근데 설아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물었다.
"너는 왜 나랑 계약한 거야?"
설아가 순간 멈칫했다.
평소 같으면 바로 튀어나올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건 나중에."
"왜."
"말하기 싫으니까."
"……"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더 캐물으려다 관뒀다.
어차피 대답 안 할 것 같았고, 나도 딱히 깊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아주 조금, 그녀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결이 느껴졌다는 것만 마음에 담아뒀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배트 스윙을 몇 번 더 연습해 봤다.
방 안에서 휘두를 수는 없어서 손목만 반복해서 돌렸다.
손목이 아팠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손바닥에 없던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했다.
돈이 되니까.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부장이 나를 불렀다.
"박 대리, 이번 달 실적 왜 이래."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
부장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옆자리 최 대리가 슬쩍 이쪽을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모니터 화면 속 숫자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젯밤 배트로 아귀 머리를 세 개나 부순 사람이, 지금은 사무실에서 고개도 못 들고 서 있었다.
이 낙차가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부장이 서류를 내 책상에 툭 던지듯 내려놓고 돌아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인간이 아귀 대가리 깨지는 소리를 한 번쯤 들어봤으면 좋겠다.'
물론 절대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균열을 넘어가면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 슬슬 관리국에 가서 정식으로 등록을 해야겠다고.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환금해 왔지만, 액수가 커지니 절차를 밟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괜히 나중에 세무조사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도 빠듯한데, 부업으로 번 돈 때문에 발목 잡히긴 싫었다.
"관리국?"
설아가 되물었다.
"거긴 왜."
"등록하고 정식으로 환금하려고. 세금 문제도 있고."
"세금?"
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되게 성실하다."
"놀리지 마."
"아니, 진심으로 놀라서."
어깨 위에서 그녀가 킥킥거렸다.
날개가 파르르 떨리는 게 등 뒤로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아는 계약자들 중에 세금 얘기 먼저 꺼내는 애는 처음 봐."
"그럼 다들 어떻게 하는데."
"그냥 암시장에다 팔지. 그게 더 빨라."
"그러다 걸리면?"
"안 걸려. 어차피 균열 관련은 관리국도 다 못 잡아."
"난 그래도 정식으로 할래."
"왜?"
"불안하잖아. 회사 다니면서 몰래 딴 돈 굴리다가 걸리면 그게 더 손해야."
설아가 잠깐 말이 없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진짜 성실맨이네, 너."
나는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관리국 지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라도 사 먹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시간이 늦어 관뒀다.
다만,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 저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서늘함이었다.
균열 안에서 느끼던 그 기운과는 조금 달랐다.
더 끈적하고, 더 집요했다.
설아도 그걸 느꼈는지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뭐지, 방금."
그녀가 속삭였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쪽을 노려봤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골목 끝을 비췄다 말았다 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있었다.
발밑에서부터 스며드는 것 같은 그 서늘한 감각은, 균열 밖에서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