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포대기에 싸여 있었다.
손발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이렇게 서러울 줄은 몰랐다. 몸을 뒤척이려 해도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성인 남자의 정신이 갓난아기의 몸에 갇혀 있다는 게 이런 감각이구나, 하고 뒤늦게 실감했다.
'..이거 완전히 단천검야 12화 설정인데.'
웃기게도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폐허 사당에서 팔찌를 줍는 장면, 그다음 갓난아기로 환생하는 전개. 내가 3년째 쓰고 있던 그 소설 그대로였다. 조회수 열두 명짜리 소설이 현실이 되다니, 이건 자랑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회수라도 좀 올려주고 오지 그랬냐. 하필 12화라니.
방 안은 은은한 향냄새로 가득했다. 창호지 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고,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부적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천장 어딘가에서 향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 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도 아니고 종이가 타는 소리도 아닌, 뭔가 미묘하게 다른 소리였다.
여자가 나를 안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눈매가 서늘했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렸는데 그 위에 꽂힌 비녀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싶어서 다시 봤는데, 아니었다. 진짜로 빛이 났다.
'..저거 무슨 마법 도구 같은 건가.'
내가 쓰던 소설에서도 술사들은 저런 비녀나 목걸이 같은 걸 매개체로 삼았다. 그런데 실물로 보니까 느낌이 또 달랐다. 소설 속 설정을 텍스트로 쓸 때는 그냥 '빛나는 비녀'라고 문장 하나로 처리하면 됐는데, 지금은 그 빛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서방님, 이 아이 좀 보세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아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남자는, 솔직히 말해서, 사극에 나오는 검객이라기보다는 어디 호스트바 실장님 같은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또렷했고, 머리는 반쯤 넘겨 있었으며, 옷고름 사이로 보이는 몸이 쓸데없이 탄탄했다.
..내가 쓴 캐릭터 설정을 내가 이렇게 실물로 마주하니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분명 내가 직접 '검미인'이라고 써놓은 캐릭터인데, 실제로 보니까 그 표현이 너무 낯간지러웠다는 걸 깨달았다.
"음, 눈빛이라..."
남자가 나를 받아 안으며 미간을 좁혔다. 손끝이 내 이마를 스쳤다. 그 손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 뭔가를 오래 쥐어온 손이었다.
'..검을 잡은 손이구나.'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한국풍 판타지 세계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검객 아버지에, 뭔가 술사 같은 어머니라니. 이거 완전 내 소설 주인공 부모 설정 그대로 아닌가.
그날 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의 이름은 강서연. 음양오행술을 다루는 술사였다. 남자의 이름은 강무진. 금위영 특별대에서 검술을 지도하는 사람이었고, 환영염류라는 이름의 검법으로 이름을 날린 실력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사람의 늦둥이 아들이었다.
늦둥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서연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볼 방법이 나에게는 없었다. 성대가 아직 그런 정교한 발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이름은... 도경이 어떨까요?"
서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경. 좋군."
그렇게 나는 강도경이 되었다.
이름이 정해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뭔가 말을 해보려 애썼다. 감사합니다, 라든가, 잘 부탁드립니다, 라든가. 그런데 내 성대는 아직 그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입을 벌려봤는데 턱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으어."
그게 다였다.
..29년 인생 통틀어서 가장 짧고 초라한 자기소개였다.
서연이 나를 안고 웃었다.
"어머, 벌써 이름이 마음에 드나 봐요."
'..그게 아니라 그냥 말이 안 나오는 건데요.'
속으로만 그렇게 항변했다. 억울했다. 스물아홉 해를 살아온 어른의 정신이 갓난아기 취급을 받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인 줄 몰랐다.
무진이 옆에서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눈매가 나를 닮았군."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건데요. 갓난아기 눈매가 다 비슷하지 않나.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물론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
서연이 무진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웃었다.
"서방님은 또 그러시네. 아이 눈매가 서방님이랑 뭐가 닮았다고."
"내 눈에는 닮았어."
무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서, 나는 잠깐 이 사람이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았다. 검을 오래 잡은 손을 가진 사람이 저렇게 순진한 소리를 하는 게 웃겼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집의 구조를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물론 눈만 굴려서 본 거지만.
방 안 한쪽 구석에 작은 소반이 있었고, 그 위에 종이로 접힌 인형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사람 모양을 한 것도 있고, 새 모양을 한 것도 있었다. 서연이 만든 물건인 듯했다.
'..저거 설마 식신인가.'
한국풍 판타지에서 술사들이 부리는 종이 인형, 식신. 내가 단천검야에서도 몇 번이나 등장시켰던 소재였다. 그게 눈앞에 실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손을 뻗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도 뭔가 성취처럼 느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서글프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 발소리는 아니었다. 뭔가 가벼우면서도 규칙적인 발소리였다. 타박, 타박, 타박. 네 개의 발이 바닥을 짚는 소리라는 걸 나는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방 한쪽 구석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작은 눈 두 개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고양이였다. 그런데 그 눈빛이 그냥 고양이 같지 않았다. 뭔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저거 눈빛 봐라. 저거 그냥 고양이 아니다.
내가 소설에서 몇 번이나 묘사했던 그 눈빛이었다. 요괴가 인간을 관찰할 때 짓는 표정. 무언가를 재고 있는, 계산하고 있는 눈빛. 그걸 실제로 마주하니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갓난아기 몸이라 등골이 서늘해져도 몸이 딱히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그 고양이가 스르륵 다가오더니,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코를 들이밀었다. 콧김이 뜨거웠다. 진짜 살아있는 짐승의 숨결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양이의 꼬리가 얼핏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게 보였다.
'..저거, 설마.'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요괴다. 진짜 요괴가 눈앞에 있다.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내가 쓴 설정대로라면 꼬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고양이 요괴는 최소 백 년 이상 묵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아무 이유 없이 갓난아기 방에 들어와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물어볼 방법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었다.
고양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야옹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딘가 사람 말처럼 들린 건 내 착각이었을까.
'..방금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분명 그냥 야옹 소리였는데, 그 안에 무언가 음절 같은 게 섞여 있었다. 뭐라고 했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그냥 짐승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연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나비야, 동생이랑 인사하는 거니?"
나비. 그게 저 고양이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이름이 나비라니. 백 년 묵은 요괴한테 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이 집 사람들 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연의 표정을 보니까 저 이름을 붙인 게 진심으로 애정이 담긴 행동이라는 게 느껴졌다. 뭐랄까, 저 여자는 저 고양이가 뭔지 알면서도 그냥 가족처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비가 나를 향해 다시 코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나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물론 아기 손이라 힘은 별로 없었지만, 붙잡는 시늉만은 확실히 했다.
나비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놀람보다는 당혹이었다. 마치 '이 갓난아기가 지금 나를 붙잡았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그대로 눈빛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나비가 나를 향해 코를 바짝 붙이더니, 아주 작게, 사람이 속삭이는 것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뭐냐."
분명히 들었다. 사람 말이었다.
방 안의 온도가 갑자기 한 단계 내려간 것 같았다. 서연도 무진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방 안에서 그 말을 알아들은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이거, 시작부터 완전히 잘못 걸렸다.'
나비의 두 갈래 꼬리가 스르륵 움직이며 내 배 위를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