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존재감 제로의 야간 통역사

3화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어라, 몸이 좀 가볍네. 두 번째 생각은 훨씬 심각했다. 손이 이상했다. 손등이 작아졌고 손가락도 가늘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고, 그 순간 뭔가 앞으로 확 쏟아지는 느낌에 흠칫했다. 그건 머리카락이었다. 원래 짧았던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잠깐 숨을 골랐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봤다. 다섯 개 다 있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취소해야 했다. 손가락이 다 있는 게 다행일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에 놓인 놋쇠 대야에 물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봤다. 거기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었어야 하는 얼굴이었다. 낯선 여자애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목구비 어딘가에 내 흔적이 남아 있긴 했는데, 성별이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눈매는 그대로인데 턱선이 부드러워졌고, 목선도 가늘어져 있었다. 대야 속 여자애가 나를 따라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나였으니까. "···와, 이건 계약서에 없던 조항인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한 톤 높고 맑았다. 나는 목을 두어 번 가다듬어 봤지만 원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거였다. 성대도 바뀐 거니까. 나는 옷깃을 들춰봤다가 확인 사살까지 당하고 조용히 다시 옷을 여몄다. 진짜였다. 완전히 바뀌었다. 심지어 체형 비율도 달랐다. 어깨가 좁아지고 허리가 잘록해진 게, 이건 그냥 성별 스위치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을 새로 뽑아낸 것 같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혼자 중얼거려봤지만 대야 속 여자애는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당연했다. 나였으니까. "놀랐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방 한가운데 작은 수정구가 떠 있고 그 안에서 누나의 얼굴이 비쳤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남 일이라고 이렇게 편할까 싶었다. "누나, 이거 뭔데요? 왜 제가···" "관에서 일하려면 손님들이 널 위협적으로 안 느껴야 하거든. 남자 몸으로는 그 조건을 못 채워. 여자 몸이 관의 기운과 더 잘 맞아."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진짜 있어요?" "어. 있어." 너무 태연하게 대답해서 더 캐묻기가 애매해졌다. 나는 잠시 뭐라도 더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뭘 물어도 저런 식으로 짧게 끊길 게 분명했다. 이 누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겪으라는 식. "돌려주긴 하는 거죠? 이거 계속 이 몸으로 사는 건 아니죠?" "근무 끝나면 돌아와. 걱정 마." "그 말, 처음 계약할 때도 들은 것 같은데요." "기억력 좋네." 수정구 속 누나가 씩 웃더니 그대로 흐려졌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왕 넘어온 거, 몸이 어떻든 일단 오늘 밤만 버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이었다. 옷을 다시 정리하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바뀌었는데도 움직이는 데 별 불편함이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몸으로 살아온 것처럼 손발이 알아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관이라는 데가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준다는 거 아닌가. 방문을 열고 나가니 긴 복도가 이어졌다. 벽에 걸린 등불이 흔들리지도 않는데 은은하게 빛을 냈다. 나무 바닥은 오래됐지만 삐걱거리지 않았고, 어딘가에서 은근한 향 냄새가 났다. 향은 익숙한 종류가 아니었다. 뭔가 달면서도 씁쓸한,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나무 무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둥실 떠 있었다. 금발 숏컷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었는데, 발이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떠 있었다. 나이는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것처럼 보였다. 로브 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살짝 흔들렸다. "신입이네." 그 애가 말했다. 표정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통역 일을 하게 된···" "오유슬. 안내원이야." 오유슬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로브 자락으로 복도 쪽을 가리켰다. "따라와." 나는 따라가며 슬쩍 물었다. "근데 왜 떠 있어요?" "바닥을 못 밟아. 그리고 문도 못 열어. 물건도 못 만져." "그럼 안내는 어떻게 해요?" "입으로 하지, 손으로 하나." "아, 그럼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해요?" "안 먹어." "자긴 해요?" "안 자." 질문할수록 대답이 짧아졌다. 더 물으면 아예 대답 안 할 기세였다. 말투가 좀 뾰족했는데, 딱히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냥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어쩌면 유령한테 성격을 따지는 게 실례인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이름은 왜 안 물어봐요?" "어차피 계약서에 있어. 다 봤어." "그럼 처음부터 신입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 부르시지." "신입 때는 신입이라고 부르는 거야. 관행이야." 우리는 복도를 몇 번 꺾어 들어가서 주방처럼 보이는 공간에 도착했다. 거기서 칼질 소리가 들렸다. 도마 위에서 뭔가를 다지는 소리였는데, 리듬이 이상할 정도로 정교했다. 마치 메트로놈에 맞춰 자르는 것처럼 일정했다. 주방 안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피부가 지나치게 창백했고, 눈 밑에 그늘이 짙게 앉아 있었다. 딱 봐도 며칠은 못 잔 얼굴이었는데, 손은 그와 다르게 놀랍도록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강다연. 요리사." 오유슬이 소개했다. 강다연은 시선도 안 주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저 오늘부터···" "알아." 대화가 그걸로 끝났다. 강다연은 다시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재료로 보이는 것들이 좀 이상했다. 야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가는 것들, 색이 형광에 가까운 뿌리 같은 것들. 살짝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저건 뭐예요?" "몰라도 돼." 다시 대화가 끝났다. 오유슬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다연이 원래 저래. 며칠 지나면 좀 말 걸어줄걸." "저 사람도 사람이에요?" "몰라. 물어본 적 없어." "물어본 적이 없다고요? 같이 일하는데?" "그런 거 물으면 안 좋아. 너도 곧 알게 돼." 일하는 방식이 다들 이런 식인가 싶었다. 뭘 물어도 절반은 대답 안 하고 절반은 무섭게 대답하는 곳. 나는 안내를 받아 관 이곳저곳을 돌았다. 상담실처럼 보이는 작은 방들이 줄줄이 있었고, 각 방마다 문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유슬은 그 앞에서 문양을 짚으며 설명해줬다. "이건 손님이 위험도가 낮다는 표시. 이건 조금 위험. 이건···" "이건 조금 위험, 그다음은 뭔데요. 많이 위험?" "어. 눈치 빠르네." "눈치가 아니라 국어를 좀 해서요." 오유슬이 어느 방문 앞에서 잠깐 말을 멈췄다. 문양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복잡했다. 선이 겹겹이 꼬여 있어서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이건?" "아, 아니야. 이 방은 오늘 안 써." 대답이 너무 빨랐다. 나는 그 방문을 슬쩍 쳐다봤다. 문양 한가운데 뭔가 붉은 실선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치 봉인처럼 보였다. 실선 끝은 문틀 아래로 이어져서 바닥 속으로 파고드는 모양이었다. "오늘 첫 손님이 여기로 배정돼 있었는데, 갑자기 바뀌었어." "바뀌었어요? 왜요?" "···신경 쓰지 마." 오유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방금까지 심드렁하던 태도와는 확실히 달랐다. 로브 자락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령도 떠는 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 손님, 어디로 갔는데요?" "몰라. 나도 몰라." "모른다면서 왜 목소리가 떨려요?" "안 떨려." "떨리는데요." "안 떨린다니까." 이쯤에서 더 밀어붙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낌새를 놓치지 않았으면서도 굳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너무 많은 걸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존재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붙은 눈치였다. 여기서 잘못 파고들었다가 원래 하루짜리 알바가 무기한 연장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도 한몫했다. "그럼 저 오늘은 뭐 해요?" "안전한 방부터 배정할게. 3번 방. 거기 손님은 조용한 편이야." "조용한 게 안전하다는 뜻이죠? 조용한데 위험한 건 아니고?" "...가서 확인해봐." 대답이 영 신뢰가 안 갔지만 별수 없었다. 3번 방 앞에 서니 문양이 단순한 원 모양이었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선도 한 줄이고 색깔도 흐릿했다. 나는 안심하며 문을 두드렸다. 문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다. 낮고 울리는, 동굴 안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였다. 문양은 원 하나뿐인데 목소리는 방 하나가 아니라 벽 전체에서 울리는 것처럼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강다연이 도마질을 딱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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