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목소리가 낯익었다. 정확히는 낯익은데 오래돼서 흐릿한 종류의 낯익음이었다. 나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3층 창밖에 사람이 떠 있는 걸 보고 이불을 덮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누구···세요?"
"섭섭한데. 옆집 살던 누나 몰라?"
그 말에 뭔가 툭 하고 걸리는 게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옆집에 살던 사람.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들 그냥 "누나"라고만 불렀으니까. 그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갔고, 그 뒤로 십 년 가까이 소식이 없었다.
기억을 뒤져봤다. 놀이터에서 그늘 밑에 앉아 있던 모습, 매미채를 들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매미를 안 잡던 모습, 그리고 이상하게 웃음소리가 컸던 것. 그런 파편들이 먼지 쌓인 서랍에서 딸려 나왔다.
창문을 여니 밤바람이 훅 들어왔다. 누나는 여전히 창밖에, 정확히는 아무것도 딛지 않은 허공에 서 있었다. 얼굴은 그때보다 하나도 안 늙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 허공에 떠 있으면 보통은 소리부터 질러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근데 나는 창틀에 손을 얹고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정도로 오늘 하루가 이미 충분히 이상했기 때문일 거다. 소풍 버스도 놓치고, 생일 약속도 깨진 날이었으니까. 이 정도쯤이야.
"진짜 누나예요?"
"그럼 가짜겠니."
"근데 왜 3층 창문 밖에···"
"현관으로 들어가면 너희 엄마가 놀랄까봐."
합리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현관으로 들어와도 놀랄 텐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게 딱히 덜 놀랄 만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누나는 창틀에 걸터앉으며 방 안을 훑어봤다. 시선이 벽에 붙은 소풍 안내문 쪼가리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빛이 뭔가 안다는 듯한 눈빛이라서, 나는 슬쩍 이불로 안내문을 가리고 싶어졌다.
"들었어. 소풍 버스에서 빠졌다며."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알아. 그리고 생일 약속도 깨졌지."
그건 좀 소름이 돋았다. 방금 일어난 일인데.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사람이세요, 진짜로."
"일 좀 물어보러 왔어."
일이라는 말에 나는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존재감 없는 애한테 누가 일을 시키겠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애라도 뭔가 쓸모가 있다면 그건 나름 괜찮은 소식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통역이야. 간호도 좀 겸하고."
"저 외국어 못하는데요. 학원도 안 다니는데."
"인간 말이 아니라니까."
"인간 말이 아니면 뭐가 있는데요? 개나 고양이도 통역이 되나요?"
"비슷한데 좀 더 심각해."
누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창밖 공기가 살짝 일그러지더니 방 안에 작은 액자 같은 게 하나 떠올랐다. 그 안에는 낯선 복도, 오래된 목재 벽에 걸린 등불, 뭔가 알 수 없는 냄새가 날 것 같은 분위기의 공간이 보였다. 등불은 불꽃 없이 그냥 빛나고 있었고, 복도 끝은 어딘가로 이어지다가 시야 밖으로 흐릿하게 사라졌다.
"여기는 '경계의 관'이라고 불려. 꿈이랑 현실 사이에 있는 곳인데, 여러 존재들이 잠깐씩 들러서 쉬어가거나 상담받고 가는 곳이야. 사람도 오고, 사람 아닌 것도 와."
"사람 아닌 거요?"
"그래. 근데 거긴 말이 다 다르거든. 존재마다 쓰는 언어가 다르고, 아예 언어랄 게 없는 애들도 있어. 그래서 통역이 필요해."
"제가 어떻게 통역을 해요? 저 그런 말 하나도 모르는데."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거니까."
말이 참 쉬웠다. 나는 팔짱을 끼고 최대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의심스러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도는 했다. 누나는 그런 내 표정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원래 안 속는 애 앞에서 연기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근데 왜 저예요? 저 아무것도 아닌데. 존재감도 없고."
"그게 이유야."
"네?"
"경계의 관은 존재감이 옅은 애가 오히려 유리해. 손님들 대부분은 너무 강한 기운을 가진 존재라서, 어중간하게 존재감 있는 인간이 통역을 하면 그 기운에 짓눌려. 근데 넌 원래도 존재감이 옅으니까 상대적으로 안전하지."
논리는 그럴싸했다. 안전하다는 말에 나는 잠깐 마음이 놓였다가, 곧바로 취소했다. 안전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재밌는 일 있어요?"
"아니,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옛날 생각이 뭔지 안 물어봤다. 물어봤어도 대답 안 해줄 것 같았고.
"그리고, 계약 기간은 딱 일 년이야. 일 년 동안 밤마다 거기서 일하면, 계약이 끝날 때 네 존재감을 되찾아줄게."
"존재감을요? 그게 돌아와요?"
"관에서 일하는 동안엔 네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못 버티는 손님들이 있어. 그러니까 매일 밤 누군가는 반드시 네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되는 거지. 그게 쌓이면 현실에도 흘러들어와."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원리를 더 캐물으면 더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일단 참았다. 근데 나는 그 순간 다른 걸 계산하고 있었다. 시급이었다.
"돈은 줘요?"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웃긴다는 듯이.
"돈 얘기부터 하네."
"당연하죠. 야간 노동이잖아요. 최저시급은 챙겨주셔야···"
"시급 개념이 아니라, 관 안에서 쓸 수 있는 화폐로 줄게. 그리고 관에서 번 걸로 관 안에서 뭘 살 수도 있어. 신기한 것들 많거든."
"현실에서 못 쓰면 의미 없잖아요. 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 먹어야 되는데 그 화폐로 삼각김밥이 나와요?"
"안 나와. 근데 대신 다른 게 나와."
"뭐가 나오는데요?"
"그건 가봐야 알아."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더 캐물어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존재감이 완전히 돌아오는 대신, 매달 조금씩이라도 네가 현실에서 체감할 수 있게 해줄게. 학교에서 네 이름을 세 번 안 불러도 담임이 한 번에 기억하는 정도로."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담임이 내 이름을 한 번에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출석 부를 때마다 두 번씩 다시 불리고, 조 짜기 할 때 마지막까지 남는 것도 이제 안 겪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잠깐 상상해봤다. 상상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위험한 건 없어요? 통역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음, 죽거나."
"···네?"
"장난이야. 대체로 그렇게까진 안 가. 초반엔 안전한 손님들만 배정해줄 거니까."
그 말에서 '초반엔'이라는 단서가 뒤통수를 살살 긁었다. 나는 그걸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 물어봐도 어차피 얼렁뚱땅 넘어갈 게 분명했으니까.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후반엔요?"
"후반엔 네가 알아서 살아남을 정도는 될 거야."
그것도 딱히 안심되는 대답은 아니었다.
"계약서 같은 거 있어요?"
"여기."
누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 글씨는 이상하게 눈에 익었는데 정확히 읽히지는 않았다. 마치 어릴 때 배운 한자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는 느낌이랑 비슷했다. 알 것 같은데 결국 못 읽는 그런 상태.
다만 맨 아래, 서명란 위에 딱 하나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본 계약은 일 년을 기한으로 하며, 갱신 및 파기의 조건은 관주의 재량에 따른다.]
관주. 그 단어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관주가 누나예요?"
"아니, 관주는 따로 있어. 나는 그냥 인사 담당이라고 해두자."
인사 담당이라는 말이 어쩐지 회사 다니는 사람처럼 들려서 조금 웃겼다.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들도 인사 담당이 있고 계약서를 쓰는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낯설었다.
관주의 재량. 그 문구가 좀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서연과의 약속도 깨졌고, 소풍에도 남겨졌고, 인생이 딱히 나아질 구석도 안 보이던 참이었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게 있나 싶었다. 그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건 나중 얘기다.
"서명하면 바로 시작이에요?"
"오늘 밤부터."
"오늘 밤 당장요? 준비할 시간도 없이요?"
"준비할 게 뭐가 있어. 몸만 오면 돼."
몸만 오면 된다는 말이 왜인지 좀 무섭게 들렸다.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 볼까 했는데 누나가 손을 저으며 그냥 이름만 적으면 된다고 했다. 볼펜도 없이 손가락으로 종이 위에 이름을 쓰자 글씨가 스스로 빛을 내며 스며들었다. 종이는 잠깐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늘해졌고, 그 서늘함이 손끝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아니, 무거워진 게 아니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방바닥이 물처럼 일렁였고 침대가 아래로 쑥 꺼졌다.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고, 시야 가장자리부터 색이 지워지듯 흐려졌다.
"누나, 이거 원래 이런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정확히는 대답이 들리기 전에 시야가 완전히 검게 변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딱 한마디 흘러왔다.
"첫날은 다들 이래. 잘 견뎌봐."
잘 견뎌보라는 말이 위로가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을 때, 이미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물어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