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필 악역 황녀의 기사라니

3화

장태오와 강도현의 인연은 기사학교 시절, 서천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명문 학급과 평민 출신 편입생이 뒤섞인 초급 연무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연무장은 매주 첫날 아침이면 서열표가 새로 걸리는 곳이었는데, 나무판 위에 이름이 새겨지는 순서가 곧 그 주 동안 받을 식사의 질과 숙소의 위치, 심지어 교관들이 건네는 말투까지 결정했다. 실력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그 서열이 곧 그날의 대우를 결정한다는 규칙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이야말로 잔인했다. 장태오는 입학 첫 해부터 최상위 서열을 차지했고, 강도현은 그 서열 다툼의 밑바닥에서 시작해 매주 열리는 공개 대결마다 그와 맞붙어야 했다. 나무판 맨 아래, 흙먼지가 가장 먼저 앉는 자리에 늘 강도현의 이름이 있었다. 스무 번, 아니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도현이 셀 수 없을 만큼 패배를 거듭한 그 시절을 두고, 장태오는 종종 다른 이들 앞에서 그를 조롱거리로 삼았다. "저 녀석은 검을 드는 게 아니라 매를 맞으러 나오는 거지." 그런 말이 연무장에 떠돌 때마다 다른 편입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강도현은 그저 검을 고쳐 쥐었다. 이상한 것은 그 조롱이 반복될수록 강도현이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는 사실이었다. 패배할 때마다 눈에 이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데이터였다. 상대가 왼쪽 어깨를 살짝 낮추는 순간이 공격의 전조라는 것, 숨을 들이쉬는 타이밍이 일정하다는 것, 그런 조각들이 하나씩 쌓여갔다. 강도현이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전생에서 그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패배할수록 상대의 검술 패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열 번째 패배 무렵에는 이미 장태오의 초식 여섯 가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고, 열다섯 번째 무렵에는 그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순간의 미세한 지연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스물한 번째 대결에서 처음으로 장태오를 이겼을 때, 연무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장태오는 강도현과 마주치는 것을 은근히 피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 그것을 잃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이었으리라. 지금 이 순간, 서천 공작가의 장자라는 신분으로 강도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장태오의 시선이 자꾸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은, 신분의 격차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그 오래된 패배의 기억 때문이었다. 가주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어린 시절 연무장 흙바닥에서 느꼈던 무력감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으면서도 묘하게 겹쳐졌다. 그날 이후 황궁 안에는 새로운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궁인 세 명의 연쇄 의문사와 황서린의 관련설이 조정 회의의 정식 안건으로 올라간 것이다. 처음에는 하급 시녀들 사이의 뒷말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사흘 만에 대신들의 서찰에 오르내리는 정식 안건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의 배후에 어떤 손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짐작케 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지금 황실을 지탱하는 세력 구도를 알아야 했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황서린을 정통 후계자로 지지하는 제1황통파로, 개혁을 지지했던 소수의 문신 관료와 몰락한 명문가 출신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나 정치적 힘은 미약했다. 이들에게는 명분은 있으나 돈도, 병력도, 궁 안의 눈과 귀도 부족했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선 세력으로, 서천 공작가를 필두로 한 몇몇 유력 가문들이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 실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저마다 다른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힘을 나눠줄 새로운 얼굴이었다. 서천 공작가는 표면적으로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반대파의 중핵이었다. 조정 회의에서 서천 공작가의 사람들이 늘 마지막에 입을 열고, 그 말이 늘 결론을 정리하는 형태로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장태오가 몇 해 전 황서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건은 이 구도 안에서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천 공작가가 혼인을 통해 제1황통파를 흡수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사건이었고, 그 실패 이후 서천 공작가는 황서린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무너뜨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 궁 안의 은밀한 해석이었다. 흡수할 수 없다면 부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강도현은 이 모든 구도를 게임 속 설정집에서 이미 읽은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저 배경 설정 텍스트의 한 줄이었을 뿐,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목숨과 명예를 걸고 벌어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은 지금이었다. 텍스트로 읽을 때는 그저 '정치적 갈등 구도'라는 항목 아래 정리된 몇 문장이었는데, 지금은 궁인 세 명의 죽음이라는 실체가 되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연쇄 의문사 사건이 조정 회의에 올라간 이상, 조사는 형식적으로는 중립적인 사법 기구가 담당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사법 기구의 수장을 이번 사건에서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조은채의 백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강도현은 이상한 예감에 손끝이 서늘해졌다. 중립을 자처하는 자리에 앉은 이가 실은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그것이 이 사건의 결말을 어느 방향으로 몰아갈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조은채는 황서린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독서 취향이 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강도현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조은채가 자신을 대할 때 보이는 미묘한 경계심의 정체를 그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회랑에서 마주칠 때면 조은채는 늘 필요 이상의 거리를 두었고, 시선은 짧게 스쳤다가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저 '흉전사'라는 별명이 궁 안에 퍼지면서, 조은채 역시 다른 이들처럼 그를 위험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 별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번 붙은 낙인은 스스로 해명한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사 개시 통보가 정식으로 내려온 날, 강도현은 황서린과 함께 조정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으로 이어지는 회랑에는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가시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회의장 입구에는 이미 장태오가 여유로운 태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강도현을 보자 짧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또 보는군, 강도현." 그의 어조에는 표면적인 예의가 씌워져 있었지만, 그 아래로 오래된 승부욕과 경계심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눈매는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이 눈 아래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시길 바랍니다." 강도현이 짧게 답하자, 장태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다시 여유로운 웃음으로 돌아왔다. "물론이지. 나야 늘 성실한 사람이니까." 그가 말하며 회의장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이미 이 사건을 어떤 결말로 이끌지 정해놓은 듯한 시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게 깔린 조명 아래 늘어선 대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했지만, 그 무표정 속에 숨겨진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강도현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회의장 가장 깊은 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시선이 황서린을 향해 먼저 꽂혔다는 것을, 강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