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흉터, 계획에 없었다

1화

리본을 매다가 손끝을 베인 순간, 머릿속에서 댐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별거 아닌 상처였다. 피 한 방울 맺혔을 뿐인데, 그 작은 통증을 신호탄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낯선 도시의 야경. 좁은 방. 모니터 불빛.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오빠, 이거 진짜 명작이야. 특히 이 여자애, 윤하은. 나중에 진짜 불쌍해져.' 동생 수아였다. 전생의 내 동생. 게임을 좋아하던 나에게 늘 신작을 들이밀던 그 애가, 화면 속 캐릭터를 가리키며 웃던 얼굴까지 선명했다. 그리고 그 얼굴 옆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강서리. 손에 든 리본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리본은 바닥에 떨어져 스르륵 펼쳐졌고, 나는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울만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은발에 붉은 눈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열여섯. 온성 공작가의 외동딸. 그리고 '장미의 맹약'이라는 게임 속에서, 히로인을 괴롭히다 파멸하는 악역 영애. 손끝이 여전히 따끔거렸다. 상처는 작았지만, 그 통증이 자꾸만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지금 이 낯선 몸에, 이 낯선 방에, 이 낯선 인생 속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몸은.' 논리적으로 정리하려 했다. 전생에서 죽었고, 게임 속 악역으로 환생했다. 나쁘지 않다. 악역은 원작 지식만 있으면 꽤 편하게 살 수 있는 포지션이다. 파멸 엔딩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 조용히 살면서 존재감을 줄인다, 히로인과 얽히지 않는다, 남주인공과는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만 관계를 유지한다. 그 정도면 파멸까지 가지 않고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안심하려던 참에, 다음 기억이 밀려왔다. 오늘 날짜. 왕립 아카데미 입학식. 게임 1장의 첫 이벤트가 벌어지는 바로 그날. '설마.' 혼자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심장은 이미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손끝의 상처보다 더 차가운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1장의 첫 이벤트는 다름 아닌, 입학식장 지붕 장식이 무너지며 히로인 윤하은이 깔릴 뻔하는 사고였다. 원작에서는 남주인공 이현 황태자가 이를 막아내며 첫 호감도를 쌓는다. 게임 안에서는 몇 줄짜리 텍스트와 잘 그려진 일러스트 한 장으로 지나갔던 장면이었다. 사고, 위기, 구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클리셰. 그때는 그저 클릭 몇 번으로 넘겼던 이벤트였다. 문제는, 나는 그 장면을 몰랐던 게 아니라 오늘 아침까지 전생을 기억 못 했다는 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세수를 할 때도, 드레스를 고를 때도 나는 그저 온성 공작가의 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피할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를 이미 흘려보낸 뒤였다. 방문이 열렸다. "아가씨, 마차 준비됐습니다." 시녀의 목소리에 나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오늘, 입학식 몇 시지?" "정오입니다만…… 아가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시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평소라면 웃으며 넘겼을 텐데, 지금은 그 시선조차 버거웠다. "안 괜찮아." 짧게 답하고 나서야 스스로도 놀랐다. 뭐가 안 괜찮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전생을 기억해냈고,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게임 속이며, 오늘 누군가 지붕 밑에서 깔려 죽을 뻔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가, 아가씨, 혹시 열이라도……" "아니. 그냥 잠을 못 잤어. 신경 쓰지 마." 시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주워 다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마무리는 제가 할까요?" "아니, 내가 할게." 리본을 다시 손에 쥐자 손끝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 통증이 오히려 나를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이건 현실이다. 꿈이 아니다. 나는 지금, 몇 시간 뒤에 벌어질 사고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침착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려 애썼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사고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를 파악하고, 어떻게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미리 흩어놓는 것. 계획은 그럴싸했다. 문제는 내가 그 계획을 실행할 힘도, 권한도, 무엇보다 시간도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지붕이 무너지는 정확한 시각도 몰랐다. 게임 텍스트에는 '입학식이 한창일 때'라고만 되어 있었을 뿐, 몇 시 몇 분이라는 숫자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공작 영애일 뿐, 아카데미 시설 관리자도 아니었다. 지붕을 손봐달라고 청하면 누가 순순히 들어줄까. '악역 영애가 뜬금없이 입학식장 지붕을 점검해달라고 한다'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는 생각만 해도 뻔했다. 리본을 마무리로 묶으며 거울을 다시 보았다. 은발의 소녀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낯선 긴장이 어려 있었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직 확실한 계획도 없이, 몸만 먼저 움직여야 했다. 마차에 오르며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은 축제 분위기로 붐볐다. 마차 창문 너머로 신입생들의 가족들이 손을 흔들고, 꽃을 파는 상인들이 목청을 높이고, 어린 아이들이 깃발을 들고 뛰어다녔다. 아무도 몰랐다. 몇 시간 뒤, 그 화창한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안심이 아니라 공포로 다가온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알고 있다는 것은 곧 책임을 진다는 것과 같았다. 만약 오늘, 저 지붕이 무너져서 누군가 다친다면,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으면서도 막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손끝의 상처가 다시 따끔거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만약 이 몸이 아니었다면.' 만약 내가 그저 평범한 관객이었다면, 이 모든 걸 몰랐다면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곧 지워버렸다. 지금은 그런 가정을 곱씹을 시간이 없었다.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을 지날 때, 시계탑의 종이 울렸다. 열한 번. 정오까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종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마차 바퀴가 돌길 위를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창밖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아카데미 본관의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 아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는 저 장식이, 몇 시간 뒤에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지만 시계탑의 종소리는 이미 끝났고, 마차는 멈추지 않고 정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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