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천마시제.”
같은 말이 한 번 더 되풀이됐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딱 잘라 통보하는 톤이었다. 마치 은행 콜센터에서 “고객님 대출 심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는 그 사무적인 억양 그대로였다.
“누구신데요, 그게. 저 이서준 아닌가요, 방금까지 죽다 살았는데.”
[천마계 최고 통치자, 천마시제. 그 자리를 이어받을 자여.]
뜬금없이 정체성 하나가 떠먹여지고 있었다.
인터넷 밈으로 치면 갑자기 “당신은 사실 이 게임의 숨겨진 진 주인공이었습니다” 같은 대사를 실사로 듣는 기분이었다.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리셋 버튼이 없다는 뜻이니까.
“저기, 잠깐만요. 저 지금 독 맞아서 죽다 살았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이서준이라는 사람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천마시제요.”
[천도의 화신, 그 일부가 이곳에 임하였습니다.]
[숙주의 기억 회복과 육신 보존을 위해 개입합니다.]
“화신이요? 저기, 화신이면 화신답게 좀 더 있어 보이게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완전 고객센터 챗봇 말투인데요. 뭐 이런 식으로, ‘고객님의 소중한 목숨,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멘트 좀 넣어주시던가.”
대답은 없었다. 대신 눈앞의 창이 이것저것 표시하기 시작했다.
[상태: 중독 (32%) / 봉인 (진행률 0%) / 기억 (봉인됨)]
[임무: 생존]
[보상: 미정]
임무 이름이 ‘생존’이라니. 이거 완전 튜토리얼 난이도 최상급 아닌가. 보통 튜토리얼은 몬스터 한 마리 잡고 끝나는데, 여긴 시작부터 생존이 목표라니 시스템 기획자가 악질인 게 분명했다.
[역대 천마시제의 권능은 후계자에게 계승되지 않습니다. 새로이 쌓아야 합니다.]
그 문장을 읽는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권능이 계승 안 된다고? 그럼 나 지금 이 성주 자리에 몸만 앉아있는 완전 허수아비 아닌가. 껍데기만 그럴싸한, 속은 텅 빈 프랜차이즈 매장 같은 느낌이었다. 간판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는.
[욥기 4:18, 그 종이라도 그가 믿지 아니하시나니 그의 천사라도 오히려 허물이 있다 하시나니]
허물이 있다는 말이 딱 지금 나 같아서 씁쓸했다.
몸도 남의 것이고, 힘도 없고, 정체도 숨겨야 하고. 이 정도면 그냥 삼중고가 아니라 사중고, 오중고 수준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도망칠 생각은 안 들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가. 아니면 이도현이라는 인간이 학생회장 짬바가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도 일단 수습부터 하려는 습성이 남아있는 건가. 대학 시절 축제 준비하다가 천막이 무너져도 일단 사람들 안전부터 챙기던 그 버릇이, 지금 이 이계에서도 튀어나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일단 시스템이라는 이 존재를 최대한 이용해먹는 게 우선이었다. 공공기관 상대할 때 배운 게 있다면, 일단 정보부터 최대한 캐내는 게 답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독은 님이 처리해준 거 맞죠?”
[임시 조치입니다. 완전한 해독을 위해서는 추가 자원이 필요합니다.]
[해독제 재료: 흑목련 뿌리, 은사초, 야명주 가루.]
“그걸 저한테 어디서 구하라고요, 지금 이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는데. 무슨 배달앱으로 시켜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숙주의 주변 인물을 활용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주변 인물이라니, 그게 누군데. 나 방금 이 몸에 들어온 지 몇 분도 안 됐는데 인맥이 어디 있어.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성주님!”
낮고 다급한, 앳된 여자아이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윤소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그냥 겁에 질린 시녀 애가 문을 확 열어제친 거로만 보였다. 방으로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게, 누가 쫓아오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게 눈에 다 보였다.
뒤이어 남자아이도 따라 들어왔다. 김두식.
둘 다 열댓 살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앳된 얼굴에 눈밑이 검게 죽어 있었다. 며칠은 못 잔 사람들 같았다. 옷차림을 보니 이 성의 하급 시종들인 듯했는데, 손끝이 다 갈라져 있는 걸 보면 고생을 꽤 한 모양이었다.
“저희가, 저희가 죽였다고 할까 봐 그래서, 아니 저희 아니에요, 진짜 저희 아닌데……”
윤소하가 울먹이며 말을 쏟아냈다. 말이 하도 빨라서 절반은 못 알아들었지만, 요약하면 억울하다는 뜻이었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둘은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겁먹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런 얼굴로 사람을 해쳤다는 건, 차라리 내가 지금 이서준이 아니라 진짜 천마시제라는 말이 더 믿길 지경이었다.
“…나 안 죽었어. 살아있어.”
일부러 최대한 이서준다운 무게감을 잡아 말했다. 사실 뭔지도 모르면서. 목소리 톤 하나로 상황을 얼마나 커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게 최고의 방어라는 건 어디서든 통하는 법칙이었다.
둘의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가,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표정 변화가 마치 신호등 바뀌는 것처럼 빨랐다.
“살아계신 거… 다행인데, 성주님, 지금 검시관이 오고 있어요.”
김두식이 낮게 속삭였다. 사투리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다급함이 섞인 어조였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는 게 뻔히 보였다.
“검시관?”
“황태석 님이 보낸 사람들이, 성주님이 정말 돌아가셨는지 확인하러 온대요. 벌써 정문을 지났다고……”
황태석. 이서준의 이부삼촌이자 이 성의 실권자.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누군가 이서준을 독으로 죽이려 했고, 그 배후가 바로 이 황태석이라는 인간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확인 도장을 찍으러 검시관이 온다는 것.
전형적인 후계 다툼, 정치 드라마에서 백 번은 봤던 그 클리셰였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 드라마의 주인공, 아니 정확히는 시체 역할로 캐스팅되어 있다는 거였다.
[욥기 18:14,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히니 그는 무서움의 왕에게 나가는 것 같으니라]
장막에서 뽑히긴 개뿔, 나는 이제 막 이 장막에 들어왔는데 왜 벌써 뽑혀야 하는데. 전세계약 하루 만에 강제 퇴거당하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문 앞까지 왔대요!”
윤소하가 거의 비명처럼 대답했다. 그 말과 동시에 저 멀리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훈련된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시스템 창이 다시 깜빡였다.
[알림: 위기 상황 감지.]
[선택하십시오: 1) 정면 대응 2) 위장 조치]
선택지가 뜨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얄미웠다. 완전 게임 튜토리얼 도입부인데 배경이 실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죽으면 로그아웃하고 다시 접속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는 거니까.
1번을 고르면 죽은 몸 상태로 죄인이 문을 벌컥 열고 “나 살았습니다!” 외치는 그림인데, 그건 아무래도 자살 행위 같았다. 검시관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면.
2번을 눌렀다.
[검은 죽음의 술법을 확인합니다.]
[적용 조건: 가사 상태 유지, 심박·체온 위장]
[요구 자원: 없음. 다만 발동 시 극심한 신체 부담 발생.]
“신체 부담이 얼마나?”
대답은 없었다. 뭘 물어도 대답 안 해줄 때는 꼭 나쁜 소식일 확률이 높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무슨 계약서 소액 글씨 같은 시스템이었다. 좋은 조건만 크게 써놓고, 리스크는 쏙 빼놓는.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러 명이다.
쿵, 쿵, 쿵.
발소리 사이에 갑옷 부딪는 소리 같은 것도 섞여 들려왔다. 촤르르르륵. 뭔가 쇠붙이가 스치는 소리였다.
윤소하와 김두식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성주님, 어떻게……”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이서준의 몸이 아직도 낯설고, 이 상황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나지만, 지금은 일단 살아야 했다. 실감이 나든 안 나든, 여기서 잘못되면 다음 화는 없을 테니까.
“나가서 검시관들 좀 지연시켜줘. 최대한.”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 쪽으로 튀어나갔다. 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는 게, 정말 걱정하는 눈치였다. 저런 애들이 왜 이 상황에 끼어 있는 건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시스템 창을 향해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짜 이거 하면 나 안 죽는 거 맞지?”
대답 대신, 창이 조용히 문장을 하나 띄웠다.
[확률: 알 수 없음.]
와, 진심으로 최악의 상담사네. 이럴 거면 대체 왜 선택지를 준 건지, 어차피 결과도 모르는데 뭘 고르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이거 무슨 랜덤박스 뽑기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선택의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