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무지 개척 시스템

5화

포탑의 경보음이 계속 울렸다. 삐이이이잉— [적 접근 감지: 규모 미확인] 나는 인벤토리 창을 열어 감지 범위를 확인했다. 화면 한켠에 붉은 점 여러 개가 지평선 너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배달앱 지도에서 라이더 아이콘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 같은 그림이었는데, 문제는 이번엔 치킨이 아니라 창과 화살이 배달된다는 점이었다. "몇 명쯤 되는지 알 수 있어요?" 아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고양이 수인의 시력이 나보다 확실히 좋은 모양이었다. 눈동자가 세로로 좁아지면서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 무슨 고성능 스코프를 장착한 것처럼 보였다. "...Twenty. Maybe more." 스물 명 이상이라고. 아까 물러난 무리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포탑 하나, 방어벽 하나, 인원 두 명. 이건 뭐 편의점 알바 두 명이 명절 대란 물량을 받아내는 꼴이었다. [사무엘상 17:45,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아왔거니와] 칼과 창으로 오는 건 저쪽이고, 나는 뭘로 대응하지.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잡았다지만, 나한텐 인벤토리 창에 뜨는 재화 몇 개가 전부였다. 포탑은 아직 하나뿐이었다. 자원이 조금 더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포탑을 지을 수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부족했다. 건설 대기 시간을 확인해봤는데, 지금 시작해도 무리가 도착하기 전에 완성될 리가 없었다. 이 게임엔 왜 스킵 티켓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런 걸 고민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요. 이번엔 진짜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No." 아린이 딱 잘라 거절했다. 처음으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눈빛이 강했다. "...I fight. I know them. I know weakness." 그들을 안다고, 약점도 안다고.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겁에 질린 표정 속에서도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창을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같이 해요." 어차피 혼자 다 막을 방법도 없었으니까, 정보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혼자였으면 지금쯤 인벤토리 창 붙잡고 눈물 콧물 짜고 있었을 거다. 무리는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엔 활을 든 자들뿐 아니라, 큰 짐승을 끌고 온 자들도 섞여 있었다. 짐승은 코뿔소처럼 생겼는데 등에 뾰족한 뿔이 여러 개 솟아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무슨 지하철 진동벨 수준이 아니라, 진짜 지진 대피 훈련 사이렌 급이었다. "...Those. Ram-beasts. Break walls." 벽을 부수는 짐승이라고. 방어벽이 저걸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갔다. 저 뿔로 한 번만 들이받으면 우리 방어벽은 그냥 종이컵 신세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남은 자원을 확인했다. 크리스탈 12개, 철광 40개, 목재 20개. 건설 탭을 하나씩 넘겨봤다.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지금 자원으로는 부족한 항목뿐이었다. 그러다 눈에 걸린 게 하나 있었다. 크리스탈로만 만들 수 있는 항목, '섬광 지뢰'. 설명을 보니 일시적으로 적을 마비시키는 함정이라고 나와 있었다. 필요 자원: 크리스탈 3개씩. 총 4개를 만들 수 있었다. 많다고 할 순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나는 오두막 앞 흙바닥에 조준선을 겨눴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네 개의 지뢰가 흙 속에 매설됐다. 겉으로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다. [섬광 지뢰가 설치되었습니다] 아린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흙바닥을 보다가 나를 봤다. "...I don't see anything." "보이면 지뢰가 아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나도 저게 진짜 작동할지 백 프로 확신은 없었다. 게임 내에서는 늘 잘 터졌지만, 여긴 현실이니까. 무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선두는 아까 그 인물이었다. 이번엔 더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마 부족 내에서 지위가 높은 자인 것 같았다. 갑옷 어깨 부분에 뭔가 상징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볼 여유는 없었다. "NYaaa! Arin! Come back or we burn everything!" 돌아오지 않으면 다 태워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아린의 손이 떨렸다. 나는 그 손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 상황에서 누가 안 그렇겠나. "괜찮아요. 계획 있어요." 사실 계획이라기엔 즉흥적인 함정 설치 정도였지만, 이 순간엔 그 말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린의 눈이 잠깐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손의 떨림이 조금 잦아든 것 같았지만, 그건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무리가 지뢰가 매설된 구역에 가까워지자, 나는 포탑을 수동으로 조작해 그들의 앞쪽 땅에 경고사격을 했다. 피이이잉— 쾅! 선두 무리가 놀라 멈춰 섰지만, 뒤따르던 코뿔소 짐승들은 그대로 돌진했다. 아무래도 저 짐승들한텐 경고사격 따위 안 통하는 것 같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화물트럭처럼 그냥 밀고 들어왔다. 쿠구구구궁! 짐승들이 지뢰가 매설된 구역을 밟는 순간— 번쩍!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터졌다. 짐승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듯 멈춰 섰다. 몸이 굳은 채 눈만 껌뻑였다. [대상이 마비되었습니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이거 진짜 게임 그대로네. 화면 밖에서 몇백 시간 굴렸던 콘텐츠가 이렇게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니, 뭔가 소름과 웃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무리 전체가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짐승들 등에 탄 사람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내리려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린도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You. Planned this?" "네, 뭐, 대충." 대충이라는 말이 진짜였지만, 이 상황에선 자신만만하게 들렸으면 됐다. 사실 저 지뢰가 안 터졌으면 지금 이 대화 자체가 없었을 거란 생각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선두 인물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NYaaaa!! Human sorcery!! Retreat and regroup!!" 마법이라며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무리는 마비된 짐승 몇을 버려두고 서둘러 물러났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큰 타격을 입은 채였다. 짐승 몸에 올라탔던 인원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깐 승리감 비슷한 걸 느꼈다. 물론 그 승리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오두막 벽에 기대어 겨우 숨을 골랐다.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렸다. 무슨 시험 발표 직전 상태 같았다. [시편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도움은 산이 아니라 크리스탈 지뢰에서 왔지만, 뭐 어쨌든 도움은 도움이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번엔 제가 만든 폭탄이 성벽보다 나았네요. 아린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Do-yun. What are you, really." 네 번째 같은 질문이었다. 매번 대충 얼버무렸는데, 이번엔 나도 조금 다르게 대답하고 싶어졌다. 방금 같이 목숨 걸고 싸운 사이한테 계속 말 돌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게임을 하다가 여기로 떨어졌어요. 제가 하던 게임 능력이 그대로 여기서 쓰이는 것 같아요." 아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눈빛엔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경계보다는 궁금증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Game?" "네. 은하개척단이라는 게임이요." 말하면서도 스스로 웃겼다. 이세계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하는 정체 고백이 게임 제목이라니. 나였어도 이런 소개는 안 믿었을 거다. 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는 못 했지만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지뢰가 터졌던 자리를 한참 바라봤다. 그 침묵이 오히려 편했다. 그때, 멀리 물러났던 무리 쪽에서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선두 인물이 하늘을 향해 신호를 쏘아 올렸다. 피융— 붉은 신호탄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터졌다. 마치 축제 불꽃놀이처럼 밝게 퍼졌는데, 저게 절대 좋은 소식일 리는 없었다. 아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 옆에서 편안해 보였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That signal. That's for the Elder." 족장을 부르는 신호라고. 지금까지 상대한 건 그냥 순찰대였을 뿐,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하늘에 걸린 붉은 빛의 잔상을 보며, 이 게임이 생각보다 훨씬 긴 시즌패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크리스탈 12개로 시작한 이 게임에서, 다음 보스는 대체 얼마짜리 패키지를 요구할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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