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무지 개척 시스템

3화

흙먼지의 정체는 곧 형체를 드러냈다. 말을 탄, 아니 정확히는 말처럼 생긴 짐승을 탄 존재들이었다. 다들 아린과 비슷한 귀와 꼬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몸에는 갑옷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활과 창을 들고 있었다. 갑옷이라고 해봤자 가죽에 뼈 조각을 덧댄 수준이었는데, 그마저도 딱 봐도 실전용이었다. 코스프레 갑옷이 아니라는 뜻이다. 숫자를 세어봤다. 열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였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확실히 많은 쪽이었다. "...은월 부족." 아린이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완전한 한국어 문장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그만큼 절박했던 모양이다. 평소엔 어눌하게 끊어 말하던 애가 이 순간에는 또박또박 발음을 하는 게, 마치 위기 상황에서만 모국어가 튀어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Family. Was." 가족이었다고. 과거형으로. 과거형이라는 게 참 무겁다. 나도 한때 회사에서 "동료였다"는 말을 써본 적이 있어서 그 뉘앙스가 뭔지는 대충 알았다. 좋게 끝난 관계는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건 짐작이 갔지만, 지금은 그걸 캐물을 시간이 아니었다. 무리는 이미 우리 쪽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투두두두두- 땅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게 지진인지 그냥 내가 겁먹어서 다리가 떨리는 건지 헷갈렸다. "NYaaaa!! Ariiiin!!" 선두에 있는 자가 뭐라고 외쳤다. 위협적인 톤이었다.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했는데, 그 알파벳 표기 특유의 이질감 때문에 위협이면서도 어딘가 만화 같은 느낌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무섭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린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꼬리 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저건 연기가 아니었다. [전도서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지금은 딱 봐도 평화 타임은 아니었다. 전도서 저자님도 이 상황을 보셨다면 "그래, 지금이 딱 전쟁할 때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을 거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도망? 몸은 가벼워졌지만 달리기 시합 우승할 자신은 없었다. 상대는 말 비슷한 걸 타고 있고 나는 두 발로 뛰어야 하는데, 이건 애초에 페이가 안 맞는 게임이었다. 숨기? 이미 들켰다. 오두막 한 채가 벌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데 안 보였을 리가 없다. 싸우기? 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 창이랑 활을 상대로 맨몸으로 붙는 건 자살행위였다. 남은 건 하나였다. "아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요." "But—" "일단 들어가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조준선을 켰을 때의 그 자신감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신입사원이 첫 야근에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해버리는 것과 비슷한, 근거 없는 오기였다. 아린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창을 놓고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이제 진짜 혼자였다. 무리는 순식간에 우리 앞까지 도달했다. 선두에 있는 자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나를 향해 활을 겨눴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NYaa! Human! Give back Arin!" 아린을 돌려달라는 말이었다. 돌려달라는 표현 자체가 좀 이상했다. 물건 취급하는 건가. 마치 택배 오배송 항의하듯이 "그거 돌려주세요"라는 뉘앙스였는데, 사람을 상대로 저런 표현을 쓴다는 것부터가 이 부족과 아린 사이에 있었던 뭔가가 결코 훈훈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는 심증을 더해줬다. 나는 두 손을 들면서도, 인벤토리 창을 슬쩍 열었다. 방어 탭에는 아까 지은 오두막 옆에 '방어벽' 항목이 떠 있었다. 필요 자원: 철광 20. 마침 철광 30개가 있었다. 아까 채취할 때 그냥 습관적으로 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인생도 이렇게 좀 저축해놓은 게 갑자기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저기요."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돌려줄 물건 아닌데요. 그리고 여긴 제 땅인데요." 무슨 근거로 여기가 내 땅이라고 주장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오두막 하나 지었다고 영토 의식이 생긴 건가. 아파트 청약 한 번 당첨된 것도 아닌데 등기부등본도 없이 이렇게 자신 있게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선두의 인물이 으르렁거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눈빛이 완전히 살기로 가득했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피융—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방어벽 버튼을 눌렀다. 사실 될지 안 될지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 누를 수 있는 버튼이 그거밖에 없었을 뿐이다. 촤르르르륵! 땅에서 반투명한 벽이 솟아올랐다. 화살은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쨍! 무리 전체가 당황한 기색으로 멈춰 섰다. 몇몇은 아예 말 위에서 몸을 뒤로 젖히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욥기 41:24, 그 마음이 돌 같이 단단하니 그것은 아랫돌처럼 튼튼하다] 돌보다 튼튼한 게 아니라, 이건 아예 물리법칙을 씹어먹는 벽이었다. 리모델링 견적 낼 때 자재 이름에 "반투명 방어벽"이라고 적으면 시공업체 사장님이 두 번 다시 전화 안 받을 그런 물건이었다. 나 스스로도 놀랐다. 방금 그 반투명 벽이 실전에서 진짜로 화살을 막아낼 거라곤 확신이 없었으니까. 게임에서 튜토리얼 넘기듯 대충 눌러본 스킬이 이렇게 실전에서 완벽하게 작동할 줄이야. 뭐지, 게임 밸런스가 왜 이렇게 사기야. 선두의 인물이 다시 뭐라고 외쳤다. 다급한 톤이었다. "NYaa! Mage!? Human mage?!" 마법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대충 그 흐름에 맞춰서 대답했다. "네, 뭐. 그런 걸로 하죠." 사실은 마법사가 아니라 은퇴한 무직 게이머였지만, 지금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신분 사기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어차피 여기 주민등록등본 떼올 사람도 없으니까. 무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벽이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몇몇은 손짓으로 뭐라 뭐라 의논을 하는 듯했는데, 그 와중에도 활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틈에 나는 다시 채취 탭을 열었다. 이번엔 조준선을 그들이 타고 있는 짐승 근처의 바위에 겨눴다. 사람을 직접 맞추면 진짜 살상이 되니, 위력 시범은 안전한 타깃으로 보여주는 게 나았다. 배달앱 리뷰에서 "맛은 있는데 양이 적어요"라는 후기를 쓸 때처럼,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한 법이다. 피이이잉— 쾅! 바위가 폭발하면서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짐승들이 놀라 뒷다리를 들며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NYaaaaa!!" 몇몇이 낙마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됐다. 한 명은 아예 땅에 나동그라져서 데구르르 굴렀는데, 그 와중에도 창은 끝까지 꽉 쥐고 있는 게 프로 정신이 대단했다. "이거 위력 시범이에요." 나는 최대한 담담한 톤으로 덧붙였다. "더 가까이 오면 다음엔 발밑에 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맞출게요." 협박이었지만, 협박치고는 되게 사무적인 어조였다. 마치 관리비 미납 안내문 읽는 톤 같았다. "다음 달까지 미납 시 단전 조치됩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심정으로, 나는 최대한 감정을 빼고 말했다. 선두의 인물이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뒤로 손짓을 했다. 무리가 천천히 물러났다. 말들의 콧김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그제야 좀 잦아들었다. "...We come back. With more." 더 많이 데려오겠다는 경고를 남기고, 그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끝난 게 아니라 그냥 1라운드가 끝난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협상 결렬 후 "다음 미팅 때 뵙겠습니다" 하고 나가는 갑질 클라이언트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지금까지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는데, 그건 정말 간지가 안 나서 참았다. [시편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도다] 두려움에서 건진 게 아니라, 방금 겨우 임기응변으로 넘긴 거지 이건. 다윗도 골리앗 앞에서 저렇게 여유롭게 시를 읊을 정신은 없었을 거다. 오두막 문이 열리며 아린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은 여전히 문 밖의 흙먼지 방향을 향해 있었는데, 그 표정에는 안도와 불안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You. Really human?" 진짜로 인간이냐고 재차 묻는 말투에서, 뭔가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What are you?"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글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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