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부스럭 소리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바위 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건 사람—아니,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이상한 형체였다. 머리 위에 삼각형 귀가 달려 있었고, 등 뒤로 길고 가느다란 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뭐지?
코스프레야?
아니, 이 황야 한복판에서 코스프레를 할 리가 없잖아.
그럼 진짜 수인?
머릿속으로 별의별 가능성을 다 굴려봤다. 혹시 누가 몰래 카메라를 찍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이 만든 NPC 몹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짜로 이 세계엔 저런 종족이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건가.
[창세기 1:24,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그래, 성경에서도 이미 이런 스타트업 아이템은 예고편으로 깔아뒀던 거였구나.
근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고양이귀까지 예고했을 줄은 몰랐지.
상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는 낡은 창을 쥔 채 자세를 낮췄다. 창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저 정도 거리에서 저렇게 떨면서 자세를 잡고 있으면, 딱 봐도 실전 경험은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겁먹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한쪽 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다른 쪽 귀보다 끝부분이 뭉개져 있었다. 오래된 상처처럼 보였다. 저게 그냥 상처면 다행인데, 혹시 이 세계에서 흔한 부상 패턴 같은 거면 어떡하지. 무슨 산업재해 통계처럼.
몸집은 나보다 조금 작았고, 낡은 가죽옷 비슷한 걸 걸치고 있었다. 옷이라고 하기엔 너덜너덜해서 재활용센터에서 건져온 커튼을 대충 걸친 수준이었다. 발에는 신발도 없었다. 맨발로 저 험한 바위 지대를 뛰어다니는 건가.
"...NYaa, don't come closer."
의사언어였다. 알파벳으로 표기될 법한 발음인데, 정작 내 귀에는 어렴풋이 뜻이 전해졌다. 다가오지 마, 정도의 경고인 것 같았다.
이건 또 무슨 원리지? 번역기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 특전인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일단 뜻이 전해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나는 두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어, 저 그럴 생각 없는데."
말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톤이라도 전달되길 바랐다. 손바닥까지 활짝 펴서 보여주는 게, 마치 편의점 알바생이 손님한테 "저 훔친 거 없어요" 하는 몸짓 같았다.
상대는 여전히 창끝을 겨눈 채 뒷걸음질쳤다. 발밑의 자갈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Hisss— you, human?"
인간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간이요, 인간. 순도 100% 무직 인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텐데 굳이 자기소개를 덧붙이는 내 습관이 이 순간에도 나오는 게 웃겼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 소개서 쓰듯 이력을 나열하는 걸 보면, 나는 진짜 어디 가서도 취준생 마인드를 못 벗어나는 인간인가 보다.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태양 두 개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편의점 알바 시절, 마감 세일 앞에서 눈치 보던 손님들이랑 똑같은 눈빛이었다. 살지 말지 고민하는, 딱 그 표정.
"...food. Give food."
먹을 걸 달라고?
오, 이거 협상 가능하겠는데.
머릿속에서 즉시 계산이 돌아갔다. 이건 완전히 배달앱 리뷰 이벤트 같은 상황이잖아. 별점 5개 주면 사이드 메뉴 추가해주는 그런 거.
나는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식량 3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딱 봐도 별거 아닌 통조림처럼 생긴 아이콘이었다. 라벨도 없고 그냥 회색 원통 모양이었는데, 이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나도 아까 하나 까먹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거 드릴게요.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정보 좀 주세요. 여기가 어디고, 당신은 뭐고, 위험한 게 뭔지."
말해놓고 보니 이거 완전 부동산 계약서 특약사항 적는 기분이었다. 등기부등본 떼보고, 하자 있는 부분 미리 다 짚어보는 그런 거.
상대는 잠깐 얼어붙었다. 아마 이런 식의 거래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창끝을 아주 살짝 내렸다. 완전히 내린 건 아니고, 딱 삼십 도 정도. 아직 신뢰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는 해보겠다는 의지 표명 같았다.
"...deal."
오케이, 콜.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면 그만큼 배가 고팠던 건가.
나는 식량 하나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통조림 아이콘을, 상대는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씹어 삼켰다. 씹는다는 표현도 애매했다. 그냥 통째로 삼켰다는 게 더 정확했다.
핥짝! 핥짝!
손가락까지 핥는 모습을 보니, 진짜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얼마나 굶었으면 저렇게 손끝 하나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는 걸까. 순간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짠하다고 해도 이 상황이 딱히 덜 위험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안심이 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뭔가 이상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나는 지금 벌벌 떨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고양이귀 달린 무장한 존재가 창을 들고 나타났는데, 왜 나는 배달앱으로 치킨 주문하듯 태연하게 거래를 하고 있는 거지.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음침한 골짜기치고는 대화가 너무 화기애애한데.
이게 목자의 지팡이 덕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상황판단이 이상하게 무뎌진 건지 헷갈렸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채취 시스템의 감각. 방금까지 바위와 나무를 폭파시키던 그 힘이, 이 존재쯤은 언제든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무의식중에 심어놓은 거였다.
무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든든했다.
이거 완전 게임에서 무기 만렙 찍고 초반 몹 만난 기분이잖아. 튜토리얼 구간 지나고 나서 뒤늦게 마을 근처 슬라임 잡으러 온 그런 느낌.
물론 저쪽이 슬라임처럼 약할지는 미지수였다. 창을 다루는 폼을 보면 어설픈 초보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상대는 식량을 다 먹고 나서야 경계를 조금 풀었다. 창을 등 뒤로 돌려 메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특이했다. 발끝으로 살짝살짝 딛는 게,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I am Arin."
아린. 이름이었다.
"저는 이도윤이에요."
"Do-yun."
서투른 발음으로 따라 하는 게 이상하게 귀여웠다. 아니, 이 상황에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인가 나. 방금 전까지 창을 겨누던 존재한테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거 보면, 나도 어지간히 위기감각이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아린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오두막 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가 순간 더 커진 게, 진짜로 놀란 반응 같았다.
"...You. Build this? So fast?"
빨리 지었다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야, 게임 시스템이 대신 지어준 거니까. 나는 못질 한 번도 안 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대답이 대답 같지도 않았지만, 아린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를 살피는 눈치였다. 경계하는 태도가 여전했다. 귀가 계속 이쪽저쪽으로 움찔거리며 소리를 잡아내려는 게 보였다.
"...Danger here. Not safe."
위험하다는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가 위험한데요?"
아린의 귀가 눕듯이 접혔다. 겁먹은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방금까지 식량 받아먹으면서 살짝 풀렸던 긴장이 순식간에 다시 팽팽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They. Coming. Soon."
그들이 온다고.
누구지, 그들이?
혹시 이 대륙의 몬스터 같은 건가, 아니면 아린을 쫓던 다른 종족인가. 아니면 진짜로 무슨 마왕군이라도 되는 건가.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슬롯머신처럼 돌아갔지만, 어느 것 하나 확답을 못 내렸다.
아린의 손이 창대를 다시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Run. Or fight. You choose."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선택하라고?
아니, 나 방금까지 통조림 나눠주면서 훈훈한 무드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존 선택지를 던지는 건 너무하잖아.
순간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지평선 너머, 뭔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그림자가 뒤섞여 흙먼지를 일으키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발굽 소리인지 발소리인지 구분도 안 되는 진동이 땅을 타고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두두두두두─
아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그쪽을 향했다. 창을 겨누는 자세가 다시 나왔다. 방금까지 손가락 핥던 존재랑 같은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Doyun. Decide. Now."
지금 결정하라고?
아니, 뭘 결정하라는 건데. 정보도 하나도 없이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야.
흙먼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형체까지 어렴풋이 구분될 정도로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