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글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뱉었다는 걸 스스로도 눈치챘지만, 정정할 여유가 없었다. 아린의 표정이 여전히 심각했다.
"...They will come back. With army."
군대를 데려오겠다는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군대라니. 이거 뭐, 갑자기 스케일이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바뀌는 느낌인데. 어제까지는 편의점 알바하다 늦게 온 손님한테 한소리 듣던 게 내 인생 최대 스트레스였는데, 오늘은 진짜로 군대와 맞짱을 뜨게 생겼다.
"얼마나 올까요?"
"...Many. Dozens."
수십 명 단위라는 소리였다. 수십 명. 사람 수로 치면 동네 아파트 단지 반상회 인원이지만, 창 들고 오는 반상회는 또 처음이었다.
[여호수아 6:20, 백성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성벽이 무너지는 쪽이 저쪽이길 바랐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팔 불고 소리치니까 예리코 성벽이 무너졌다는데, 나는 나팔도 없고 소리칠 배짱도 없었다. 대신 있는 거라곤 게임에서 튀어나온 인벤토리 창 하나뿐이었다.
나는 인벤토리 창을 다시 열었다. 이번엔 제대로 훑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아까는 급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눌렀지만, 지금은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마치 처음 편의점 앱을 켜고 오늘의 할인 상품을 훑어보는 기분으로, 나는 탭을 하나씩 넘겼다.
건설 탭에는 오두막 외에도 '자동방어포탑', '자원 저장고', '드론 공장' 같은 항목이 있었다. 각각 필요 자원이 상당했다.
포탑: 철광 100, 목재 50.
저장고: 목재 80.
드론 공장: 철광 150, 목재 100.
지금 가진 자원으로는 어느 것도 지을 수 없었다. 채취를 더 해야 했다. 마치 게임 초반에 튜토리얼 몹만 잡다가 정작 보스는 코앞인데 장비가 하나도 안 갖춰진 그 느낌.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제로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아린, 근처에 채취할 수 있는 게 더 있어요?"
아린은 잠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마 이 상황에서 자원 채취를 걱정하는 인간이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창 들고 온다는 군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채굴 이야기로 넘어가니, 저쪽 입장에서는 정신이 나간 놈처럼 보일 만도 했다.
"...East. Rocks. Many rocks."
동쪽에 바위가 많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아린이 창을 다시 쥐고 뒤따랐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언제 뒤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경계하는 사람처럼, 계속 주변을 살피면서.
"...You not scared?"
무섭지 않냐는 질문에 나는 잠깐 생각했다.
"무섭죠."
사실이었다.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아까부터 쉬지 않고 뛰어대고 있었고, 목덜미는 땀으로 축축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안 무서운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근데 무서워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아린은 그 말을 듣고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 된다기보단, 이해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표정이었다. 뭐랄까, 회사에서 야근하면서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라고 중얼거리는 대한민국 직장인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것뿐인데, 그게 대단한 각오처럼 보이나 보다.
동쪽으로 이동하자 정말로 바위 지대가 펼쳐졌다. 게다가 그냥 바위가 아니라, 반짝이는 광물이 박혀 있는 것들이 많았다. 마치 어디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원석 진열대 같은 모양새였는데, 실제로는 훨씬 위험천만한 물건들이었다.
[욥기 28:1, 은이 나는 광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금은 아니었지만, 은하개척단 시스템에서는 이것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은광 금광 다 좋으시겠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크리스탈 몇 개가 더 소중했다.
나는 조준선을 하나씩 겨누기 시작했다.
피이이잉— 쾅!
피이이잉— 쾅!
피이이잉— 쾅!
연속으로 바위들이 폭발했다. 광석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며 자동으로 인벤토리에 쌓였다. 마치 확률형 아이템 뽑기라도 하는 것처럼, 터질 때마다 뭐가 나올지 기대감이 생겼다. 이러다 진짜 도박 중독자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철광석 45개를 채취했습니다]
[희귀광석: 크리스탈 3개를 획득했습니다]
크리스탈?
오, 이거 뭔가 고급 아이템 냄새가 나는데. 마치 게임에서 레어템 뜨면 화면 번쩍이는 그 느낌.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무서워서가 아니라 순전히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린은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창을 쥔 손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How. How many can you destroy."
얼마나 많이 부술 수 있냐는 질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자원이 있는 만큼? 아니, 정확히는 제 채취 범위 안에 있는 만큼."
말하면서도 사실 나 자신도 이 시스템의 한계를 정확히 몰랐다. 게임에서는 맵 전체가 다 채취 대상이었으니까. 만약 이 동쪽 바위 지대가 다 채취 범위에 들어간다면, 나는 여기서 광산업이라도 차릴 판이었다.
한 시간쯤 더 작업하니 철광 290개, 목재 250개, 크리스탈 12개가 모였다. 손목이 뻐근했다. 조준선을 겨누는 동작 자체는 별로 힘이 안 드는데, 정신적으로 계속 집중하는 게 생각보다 피곤했다. 마치 오랫동안 모니터만 쳐다보고 게임했을 때 오는 그 눈의 뻑뻑함과 비슷했다.
나는 즉시 건설 탭을 열어 자동방어포탑을 지었다.
촤르르르르륵!
오두막 옆에 삼각형 모양의 금속 구조물이 솟아올랐다. 상단에는 회전하는 포신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은색 표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는데, 그 모습이 어이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오두막은 조잡한 나무집인데, 그 옆에 이런 최첨단 무기가 서 있으니 배치가 영 어색했다.
[자동방어포탑이 건설되었습니다]
[적 침입 감지 시 자동으로 사격합니다]
아린이 그 앞에 서서 입을 벌렸다.
"...This. This is not human weapon."
인간의 무기가 아니라고. 뭐 어떡해, 나도 이게 왜 되는지 모르는데. 굳이 설명하자면 "게임 시스템이 현실에 이식됐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그건 아린 입장에서 더 이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웃고 넘어갔다.
나는 이어서 자원 저장고와 드론 공장까지 지었다. 목재와 철광이 순식간에 바닥났지만, 오히려 더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자원만 계속 확보하면, 시스템이 알아서 나머지를 굴려줄 거였다. 마치 방치형 모바일 게임에서 자동사냥 켜놓고 잠자는 그 기분. 물론 여기서 잠들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지만.
드론 공장에서 첫 드론이 나오는 순간, 작은 로봇 팔이 달린 구체가 하늘로 떠올랐다.
위이이이잉—
드론은 근처 바위로 날아가더니 자동으로 조준선을 만들고 채취를 시작했다.
피이이잉— 쾅!
나 없이도 자원이 쌓이는 걸 보고 있으니 뭔가 감격스러웠다. 마치 알바 하나 새로 고용한 사장님 심정이랄까. 저 드론한테 월급 안 줘도 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전도서 5:19,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바 그 재물을 얻고 부요를 누리게 하사]
부요는 아직 멀었지만, 최소한 방치형 게임의 매력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하나님도 이런 시스템 만드셨으면 성경에 인벤토리 창 하나쯤 넣어주셨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구절은 없었다.
아린은 그 모든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문득 나를 돌아봤다.
"...Do-yun. Are you really just human?"
같은 질문이 세 번째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게임 능력이 그대로 현실에 이식됐다고 설명하면 믿어줄까. 아니, 애초에 나조차도 이걸 완벽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결국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확실한 건, 저 자원 덕분에 오늘 저녁은 굶지 않을 거란 거예요."
아린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봤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오두막 옆에 앉아, 드론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 표정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남아 있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려는 기색도 보였다.
나는 그 틈에 저장고에 쌓인 자원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크리스탈로 뭘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서 건설 탭을 뒤졌지만, 아직 해금된 항목은 없었다. 아마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열리는 모양이었다. 게임에서도 늘 그랬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가, 조건 채우면 갑자기 옵션이 쏟아지는 그 패턴.
그 순간이었다.
포탑이 갑자기 회전하며 경보음을 울렸다.
삐이이이잉—
[적 접근 감지: 규모 미확인]
아린이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다시 새하얗게 질렸다.
"...They're back. Already?"
너무 빠른 재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