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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다. 마을의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가 정리한 농법은 옆 마을까지 소문이 퍼졌고, 홍문석의 글방에는 매년 아이들이 늘었다. 나는 여전히 조용한 아이로 통했다. 사람들은 마을이 달라진 이유를 이만호의 성실함과 홍문석의 학식으로 설명했지, 그 뒤에 있는 애매한 기프트를 가진 소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게 편했다. 밭두렁을 걷다 보면 예전과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두 해 전만 해도 잡초가 반이던 자리에 지금은 줄지어 심은 작물이 바람에 흔들렸다. 지붕도 하나둘 새로 얹었다. 마을 어귀의 낡은 정자도 누군가 손을 봐서 기둥이 반듯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나아졌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해 초여름, 촌장 박덕수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영주님 쪽에서 곧 이 지역 마을들을 순회 시찰한다는 소문이 있어." 박덕수가 마당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청하마을이 요즘 눈에 띈다는데, 문제는 내가 행정 처리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말이야. 장부도 엉망이고, 세금 계산도 매번 헤매고." 박덕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관리하는 마을 장부는 늘 뒤죽박죽이었다. 밭 면적을 재는 방식부터 세금을 걷는 기준까지, 마을마다 관행이 달랐고 청하마을은 그중에서도 특히 주먹구구식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세금 낼 때 옆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박덕수는 작년 낸 만큼 대충 내라는 식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자는 덜 내고, 형편 어려운 집이 더 내는 일이 흔했다. "그거 말고도," 박덕수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회의 때마다 사람들이 이건 왜 이렇게 걷냐, 저건 왜 저렇게 걷냐 따지는데, 나는 설명할 말이 없어. 그냥 예전부터 그래왔다고 하면 다들 성질내고. 이번에 시찰단 온다는데 이 상태로 보이면 우리 마을만 찍히는 거 아닌가 걱정이야." 아버지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 대화를 옆에서 듣다가, 박덕수가 돌아간 뒤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촌장님한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제 내 기프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자신이 직접 겪은 변화를 생각하며 순순히 받아들인 쪽이었다. "조심해서 해."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소문나면 곤란해질 거니까." [대상: 박덕수. 신뢰 관계 형성 확인. 스킬 부여 가능. 추천 스킬: 매니지먼트] 시스템 창이 뜬 걸 보고 나는 잠깐 웃었다. 매니지먼트. 딱 필요한 게 나왔다. 촌장이 관리 능력이 없어서 문제라면, 관리 능력을 주면 될 일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풀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허무하기도 했다. 다음 날, 나는 박덕수를 찾아갔다. 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지만, 안에 들어가면 서류들이 쌓인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종이는 색이 다 바래 있었고, 어떤 건 습기를 먹어 귀퉁이가 말려 있었다. 저 안에서 세금 기준을 찾겠다는 게 애초에 무리였다. "저기, 촌장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손 좀 잡아봐도 될까요?" 박덕수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뭐 하려고?"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박덕수는 아버지에게 들은 게 있는지 별 의심 없이 손을 내줬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농사도 짓고 행정도 보는 사람의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스킬 부여: 매니지먼트 — 대상: 박덕수] [결과: 대상의 자질과 상황에 따라 효과가 조정됩니다] 박덕수의 몸이 잠깐 휘청였다. 나는 그를 부축했다. 몇 초 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이 장부." 박덕수가 책상 위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겠다. 세율 기준이 마을마다 다른데, 우리는 옛날 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었어. 이걸 이렇게 바꾸면..." 박덕수는 종이를 넘기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예전에는 서류만 보면 한숨을 쉬던 사람이 이제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일을 해온 사람 같았다. "밭 면적을 재는 것도 문제야. 발걸음으로 재던 걸 그대로 쓰고 있잖아. 이건 자로 다시 재야 해. 그리고 세금 걷는 시기도 추수 직후로 몰려 있는데, 이걸 나눠서 걷으면 사람들 부담이 줄어." 그는 그날부터 밤새 장부를 다시 정리했다. 등불을 밝히고 앉아 숫자를 옮기는 소리가 담벼락 너머로 들렸다고, 나중에 옆집 아주머니가 말해줬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세금 배분 방식을 발표했는데, 그 방식이 이전보다 훨씬 공평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밭 면적에 따라 세율을 나누고, 형편이 어려운 집은 걷는 시기를 늦춰주는 조항도 새로 넣었다. 불만이 있던 사람들도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촌장이 요즘 사람이 달라졌어." 마을 어귀에서 아주머니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걸 들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다.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갔다. 박덕수는 그 뒤로 마을 행정을 완전히 새롭게 정비했다. 밭 경계를 다시 측량하고, 세금 징수 시기를 조정하고, 마을 회의 방식도 체계적으로 바꿨다. 회의 때마다 종이에 안건을 미리 적어 나눠주고, 발언 순서도 정했다. 예전에는 다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자리였는데, 이제는 순서를 지키며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엔 낯설어했지만 곧 적응했다. 몇 달 뒤 영주의 시찰단이 청하마을을 방문했을 때, 시찰단 관리는 마을의 장부와 체계를 보고 놀라움을 표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이 정도 체계를 갖췄다니." 관리가 박덕수에게 말했다. 장부를 넘기던 손이 잠깐 멈췄다. "다른 마을들은 아직도 발걸음으로 밭을 재고 있던데, 여긴 자로 재고 도면까지 그려놨군요. 영주님께 좋게 보고드리겠습니다." 박덕수는 그 뒤로 마을에서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서게 됐다. 영주 쪽 사람들과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겼고, 마을의 대표성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시찰단이 다녀간 뒤로는 인근 마을 촌장들이 청하마을로 견학을 오는 일도 생겼다. 박덕수는 그럴 때마다 어깨를 펴고 설명을 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만족했다. 이런 게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하은은 그 무렵 청년단이라는 조직에 들어가 있었다. 마을 자경 활동을 겸하는 작은 모임이었는데, 하은의 마도공주 기프트가 그곳에서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냈다. 순찰 중에 산짐승을 상대할 때도, 밤길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나갈 때도 하은이 앞장섰다. 부단장 자리까지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마을 어귀에서 하은을 축하해줬다. "이게 다 네 덕이라고 해도 되는 거지?" 하은이 웃으며 물었다. 볕에 그은 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 원래 재능 있었잖아." "그것만으로는 안 됐을 거야." 하은의 표정이 잠깐 진지해졌다. 목소리도 낮아졌다. "그날 네가 준 거, 그게 없었으면 나는 지금쯤 완전히 무너져 있었을걸." 나는 그 말에 뭐라 답할지 몰라서 그냥 시선을 돌렸다. 이런 순간이 오면 늘 어색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는데, 자꾸 그런 말을 들으면 뭘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단장이면 이제 순찰도 네가 짜는 거야?"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응. 근데 요즘 순찰 루트가 좀 이상해." 하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예전엔 산길 쪽만 대충 돌면 됐는데, 요즘은 마을 경계 쪽까지 넓혀야 한다고 단장님이 그러시더라고." 나는 그때는 그 말을 별생각 없이 넘겼다. 마을이 조금씩 발전하는 사이, 최도영은 오히려 눈에 띄게 사라져갔다. 검사 기프트를 가진 그 애는 한동안 마을 청년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박덕수의 체계가 정비되면서 청년단 가입 기준도 엄격해졌고, 도영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 애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도영은 원래 힘으로 밀어붙이는 걸 잘했지, 규칙과 시험 같은 건 질색이었다. "기준이 뭐 이래." 청년단 선발 시험이 끝난 날, 도영이 마을 어귀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표정이 험악했다. "칼 좀 쓴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니. 무슨 서류까지 써야 한다는데." 그 뒤로 도영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이웃 마을에 볼일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볼일의 성격이 점점 이상해졌다. 어느 날은 낯선 옷을 입고 돌아왔고, 어느 날은 꽤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나타났다. 은장식이 달린 허리띠라든가, 마을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무늬가 새겨진 단검 같은 것들이었다. "저 자식,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마을 청년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영은 마을에서 점점 겉돌고 있었고, 그게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 몇 번 같이 놀았던 사이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하은은 그 소문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저런 애들이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거, 처음 보는 게 아니야." 하은이 어느 날 진지하게 말했다. 순찰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하은의 얼굴에 평소와 다른 긴장이 있었다. "청년단 순찰 중에도 이상한 얘기들이 들려. 인근 지역에 도적단이 있다는 소문. 그게 도영이랑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도적단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 조용한 마을에 그런 위협이 실제로 닥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 내가 물었다. "아직은."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소문이야. 근데 소문이 계속 커지고 있어. 옆 마을 상단이 지나가다가 물건을 털렸다는 얘기도 있고, 어떤 집은 밤에 담을 넘은 흔적이 있었다고도 하고." "단장님한테는 얘기했어?" "했지. 근데 아직 증거가 없다고 좀 더 지켜보자고 하시더라." 하은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꾸 도영이 얼굴이 떠올라. 저번에 걔가 들고 온 그 단검, 그거 어디서 구했겠어. 우리 마을엔 그런 물건 만드는 사람 없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도영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고,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냥 넘겨짚는 거일 수도 있어." 나는 애써 가볍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은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하은의 표정은 오래 남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시스템 창을 오래 들여다봤다. 마을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그 뒤에서 뭔가 다른 게 자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에서 풀벌레 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알림: 새로운 위협 요소가 감지되었습니다] 그 문장이 뜬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다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위협 요소. 구체적으로 뭔지는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이 시스템은 필요한 것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짐작하게 만들었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그 글자만 유난히 밝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 날 도영을 한번 찾아가 볼까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찾아가서 뭐라고 물을 건데. 요즘 뭐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순순히 답할 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괜한 시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애매했다. 하은의 말대로 도적단이 정말 이 근방에 있다면, 마을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게 다 무너질 수 있는 일이었다. 세금 체계를 정비하고, 청년단을 키우고, 글방에 아이들이 늘어난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도적단 하나가 들이닥치면 그게 다 무너지는 거였다.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났다가 곧 멈췄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밤이었는데,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이 마을에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게 내 목표였다. 그런데 그 목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뭔가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도영이 어디서 그 단검을 구했는지, 그가 드나드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도적단이라는 소문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시스템 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한 줄의 경고문만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그 빈자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결국 다음 날 아침 일찍 하은을 다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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