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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여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은 또렷했다. 서울의 좁은 원룸, 편의점 알바, 야근하다 쓰러진 것까지.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청하마을이라는 곳의 갓난아기였고, 몇 년이 지나서야 말을 하고 걷는 법을 다시 배웠다. 젖병을 빨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편의점 유통기한 스티커를 떼던 손동작을 떠올렸다. 걸음마를 떼는 다리는 후들거렸는데, 정신은 서른 줄에 가까웠다. 그 낙차가 우스웠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벌어졌을 뿐이고, 그런 일을 두고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청하마을은 작았다. 밭과 개울과 낡은 예배당 하나, 그게 전부였다. 아침이면 닭 울음소리가 마을을 깨우고, 저녁이면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 냄새가 골목마다 퍼졌다. 사람들은 서로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만큼 가까이 살았다. 이 세계에는 신이 있었고, 신은 아이가 여섯 살이 되면 '기프트'라는 걸 내려주었다. 사제가 세례식에서 그 기프트를 확인해주는 게 마을의 큰 행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몇 달 전부터 그날을 기다렸다. 누구네 집 아이는 뭐가 나올까, 밭일을 하다가도 그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예배당 마당에는 아이들 열댓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마당에는 마을 사람 절반이 몰려와 있었다. 어머니들은 앞치마를 두른 채 발을 동동거렸고, 아버지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사제 홍문석이 아이들 이마에 손을 얹고 뭐라 중얼거리면, 머리 위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그 빛의 모양과 색으로 기프트의 종류를 짐작한다고 했다. 순서는 나이순이었고, 나는 그중 어린 편이었다. 정하은의 차례에서 마당이 조용해졌다. "마도공주." 홍문석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런 건, 십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데." 하은의 머리 위에서 빛이 별 모양으로 퍼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은백색 빛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냥 옆에 서서 지켜봤다. 대단한 애구나, 생각만 했다.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열 명 남짓한 마을 아이들 중에서 마도공주라니. 이 세계 기준으로 어느 정도 급인지는 몰라도, 사람들 반응만 봐도 흔한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최도영의 차례는 그다음이었다. 빛이 검 모양으로 뭉쳤다. 날카롭게 뻗은 칼날 형태가 잠시 허공에 떠 있다가 스러졌다. "검사." 홍문석이 짧게 말했다. "전투 계열로는 상급이다." 도영은 그 말을 듣고 턱을 치켜들었다. 한 살 위인 그 애는 이미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원래도 목소리가 크고 몸도 큰 편이라,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던 애였다. 기프트까지 확인받았으니 이제 눈치 볼 게 없다는 얼굴이었다. 옆에 서 있던 아이 몇이 벌써부터 도영에게 잘 보이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내 차례가 왔다. 홍문석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는 길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이마에 그대로 전해졌다. 마당이 조금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머리 위로 옅은 빛이 떠올랐다.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흐릿하게 번지다가 흩어졌다. 색조차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회색과 옅은 노란빛이 뒤섞인 모호한 빛이었다. "음." 홍문석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형태다." 애매하다는 말은 곧 별거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금방 흩어졌다. 몇몇은 아예 하품을 하며 다음 아이를 기다렸다. 그날 세례식의 주인공은 정하은이었고, 그다음은 최도영이었다. 나는 셋째, 넷째쯤도 못 되는 순번이었다. 세례식이 끝난 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내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다.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 전생에서 나는 늘 조용한 쪽이었고, 그게 편했다. 이번 생에서도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기프트 판별 완료: 주는 자] [설명: 대상에게 스킬 및 지식을 부여할 수 있음. 발동 조건 — 대상의 동의와 최소한의 신뢰 관계]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그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문장이 눈앞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알게 됐다. 나는 한동안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낡은 나무 서까래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그걸 세다가 다시 그 문장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스킬을 준다니. 나 자신이 가진 게 있어야 줄 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빼면. 아, 그거였구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가진 건 전생의 지식이고, 그걸 이 세계 사람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편의점 재고 관리법부터 컴퓨터 언어까지, 이 세계에는 없는 것들이 내 머릿속에 잔뜩 들어차 있었다. 그게 스킬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무서웠다. 정확히 말하면 겁이 났다기보다는, 이게 알려지면 귀찮아지겠다는 계산이 먼저 섰다. 여섯 살짜리가 세상 모든 지식을 나눠줄 수 있다는 걸 마을 어른들이 알면 무슨 일이 생길지 뻔했다. 성직자들이 몰려오거나, 영주가 데려가거나, 최악의 경우엔 이용당하다 버려질 수도 있었다. 전생에 본 드라마들이 그런 결말을 수십 번은 보여줬다. 착취당하는 천재 아이, 실험당하는 특이한 아이. 결말은 늘 비슷했다. 살아남는 쪽은 드물었다. 숨기자. 그게 첫 결론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결론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다음 날부터 나는 평범한 아이 흉내를 냈다. 애매한 기프트를 가진 조용한 애. 그게 딱 맞는 위장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밭에 나가 어른들 심부름을 할 때도, 나는 딱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굴었다. 질문을 받으면 짧게 답하고, 나서서 뭘 잘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도영은 자기보다 강한 기프트를 가진 아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자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완전히 군림했다. 유일한 예외가 정하은이었다. 마도공주라는 희귀 기프트를 가졌다는 게 도영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검사와 마도공주, 둘 다 상급이라는 건 알지만, 사람들 입에 더 오래 남는 이름은 하은 쪽이었다. 괴롭힘은 은근했다. 밭일 심부름을 떠넘기거나, 개울가에서 놀 때 하은만 빼놓거나, 가끔은 대놓고 밀치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 눈에는 잘 걸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이들 장난처럼 보였고, 그래서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몇 번 봤다. 개울가 돌다리 위에서 도영이 하은의 물동이를 걷어차던 날도 그중 하나였다. 물동이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하은은 아무 말 없이 깨진 조각을 주웠다. 손끝이 조각에 스쳤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도영은 그걸 보고 웃었다. 옆에 있던 아이 하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나설 이유가 없었다. 나설수록 눈에 띌 뿐이었다. 괜찮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내 일이 아니다. 그날 밤에도 목소리가 떴다. [대상: 정하은. 신뢰 관계 형성 시 스킬 부여 가능. 추천 스킬: 정신통일]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읊었다. 신뢰 관계라는 게 조건이라면, 나는 하은과 말을 섞어본 적조차 거의 없었다. 인사조차 몇 번 한 게 다였다. 그런데 시스템은 이미 그 애를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왜 하필 하은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 애의 기프트가 너무 컸고, 그만큼 무너지기도 쉬웠다. 마도공주라는 재능을 가진 채로 매일 괴롭힘을 당하면, 그 재능이 다른 방향으로 뒤틀릴 수도 있었다. 시스템이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대상을 골랐다면, 이건 단순한 기프트가 아니라 뭔가 더 큰 목적을 가진 힘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뭐. 나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내가 나설 이유는 여전히 없었다. 남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다는 게 전생부터 이어진 원칙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도영의 괴롭힘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졌다. 처음엔 물동이를 걷어차는 정도였지만, 나중엔 하은이 들고 가던 나뭇단을 흩트리거나, 밥 먹는 자리에서 일부러 자리를 안 내주는 식으로 번졌다. 마을 아이들 몇몇이 그 애를 따라 하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무리에서 밀려난 아이의 표정이 어떤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교실 뒤편에 혼자 앉아 있던 애들의 얼굴.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던 애들의 뒷모습. 나는 그런 걸 지켜보는 쪽이었지, 끼어드는 쪽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하은이 예배당 뒤쪽 계단에 혼자 앉아 있는 걸 봤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계단 옆으로 낡은 벽돌담이 이어졌고, 그 위로 저녁 그늘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찮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남 일에 끼어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깨의 떨림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계산이 자꾸 흐트러졌다. 계산이라는 게 원래 딱 맞아떨어져야 계산인데, 자꾸 어긋난 답이 나왔다. 결국 나는 그날 아무 말도 걸지 않고 돌아섰다. 아직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뒤통수가 뜨거웠다. 하지만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시스템 창을 오래 들여다봤다. [대상: 정하은. 신뢰 관계 형성 시 스킬 부여 가능] 조건이 뭘까. 신뢰 관계라는 게 정확히 어느 수준을 말하는 걸까. 나는 그 문장 아래 아무 설명도 없다는 게 답답했다. 전생에서 봤던 게임들은 다 조건을 숫자로 알려줬는데, 이건 그런 게 없었다. 그냥 '형성 시'라는 모호한 문구뿐이었다. 호감도 몇 퍼센트, 친밀도 몇 포인트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하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 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저기." 마당 어귀에서 하은이 물동이를 놓친 걸 내가 대신 주워줬다. "괜찮아?" 하은은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물동이를 받아갔다. 눈두덩이 조금 부어 있었다. 밤새 운 건지, 아침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표정에 경계가 서려 있었다. 당연했다. 그 나이 애들에게 갑자기 다가온 사람을 의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라면. 그게 다였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하은은 물동이를 들고 총총 사라졌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결심 비슷한 걸 했다. 이 마을을 조금 더 살 만하게 만들자. 정확히는, 이 마을이 망가지는 걸 그냥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관찰자였지만, 이번 생에는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쓰지 않으면 그냥 썩어버릴 힘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여태 숨기는 데만 신경 썼는데, 뭘 할지를 생각하니 다른 감각이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시스템에게 질문 비슷한 걸 던졌다. 신뢰 관계, 어떻게 만들면 되는 거냐고. 대답은 없었다. 그냥 그 문장만 조용히 떠 있다가 사라졌다. 몇 번을 더 물어봐도 똑같았다. 이 시스템은 묻는 말에 답해주는 종류가 아니었다. 답을 구하는 대신, 나는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하은의 물동이를 대신 들어주기로 했다. 작은 일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물동이를 받아 개울까지 함께 걷는 것. 하은은 처음 며칠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곁눈질로 나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주 짧게라도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고마워." 그 한마디가 나온 날,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라는 걸, 그때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동이를 들어주는 게 계속되던 어느 날, 도영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애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너도 걔 편이냐."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투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위험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영의 시선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 내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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