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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해 가을, 아버지가 밭에서 허리를 삐끗했다. 이랑을 고르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고 했다. 순간 삐끗한 정도였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부축해서 겨우 방문까지 나오는 걸 봤다. 아버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일을 쉬어야 했다. 마을에서 농사가 유일한 생계였던 우리 집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가을걷이가 코앞이었다. 벼는 익어가고 있었고, 밭에는 뽑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었다. 하루라도 늦으면 그해 소출이 통째로 줄어드는 시기였다. 어머니는 걸음마도 못 하는 도하를 업고 밭일을 대신하려다 넘어질 뻔했다. 등에 업힌 도하가 자지러지게 울었고, 어머니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쪽 무릎을 땅에 짚으며 균형을 잡았다. 흙바닥에 손을 짚은 어머니의 손등이 붉게 긁혀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부엌 앞에 서서 지켜봤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뭔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상: 이만호. 신뢰 관계 형성 확인. 스킬 부여 가능. 추천 스킬: 농업과학] 아버지는 오랜 시간 부여 조건을 이미 채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뢰 관계라는 조건은 하은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십 년 넘게 같이 산 아버지와 딸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그날 밤, 아버지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걸 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방 안은 어두웠고, 아버지의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이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 나는 손을 뻗었다. "손 좀 잡아봐도 돼요?"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손을 내줬다. 어둠 속에서도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왜, 아프냐?" "아니요, 그냥." 거짓말이었다. 그냥일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손바닥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톱 밑에는 흙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손을 잡고 나는 눈을 감았다. [스킬 부여: 농업과학 — 대상: 이만호] [결과: 대상의 자질과 상황에 따라 효과가 조정됩니다] 효과는 하은 때와 달랐다. 아버지는 그날 밤 유독 잠을 설쳤다고 했다.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방 밖까지 들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멍한 듯도 하고, 뭔가에 놀란 듯도 한 얼굴이었다. "이상한 꿈을 꿨다." 밥상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숟가락을 든 손이 살짝 멈춰 있었다. "밭에 거름을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씨앗을 어느 깊이로 심어야 하는지... 다 알겠는 기분이야." 어머니는 그 말을 반신반의하며 들었다. "허리 삐끗한 사람이 별소리를 다 하네." 웃으며 넘겼다. 나는 밥그릇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알을 세는 기분으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밭에 나가면 다른 사람이 됐다. 허리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밭두렁을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다. 이랑의 폭을 다시 잡고, 씨앗의 파종 시기를 바꾸고, 거름 비율을 새로 정했다. 삽을 든 손짓이 예전과 달랐다. 확신이 있는 손짓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이만호가 허리 다치고 머리도 다쳤나." 그런 말이 돌았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우리 밭에서 나온 작물의 양이 눈에 띄게 늘어난 걸 확인하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콩이며 무며, 옆집 밭보다 확연히 크고 실한 것들이 나왔다. "이만호가 요즘 이상하게 똑똑해졌다니까." 촌장 박덕수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와 한참 대화를 나눈 뒤 그렇게 말했다. 마당에 서서 팔짱을 끼고 아버지 밭을 넘겨다보는 눈빛이 진지했다. "이거 다른 밭에도 좀 알려줄 수 있나?"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그 광경을 부엌 문틈으로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됐다. 이렇게 조용히 퍼지는 거면 나쁘지 않다. 아버지가 마을에서 대접받는 것도, 우리 집 곡간이 채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해 겨울, 사제 홍문석이 나를 따로 불렀다. 예배당 안쪽 작은 방이었다. 책들이 낡은 선반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섞여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리는 게 보였다. "네 기프트 말이다." 홍문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때 판별이 제대로 안 됐던 게,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나는 침묵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창밖 눈발을 보는 척했다. "요즘 마을에 이상한 변화가 몇 개 있었지." 홍문석의 눈빛이 예리했다. 안경 너머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만호가 갑자기 농업에 통달한 것도 그중 하나고. 그게 너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켰구나. 나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지만, 홍문석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손끝이 살짝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틀렸으면 아니라고 해라." 홍문석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맞았으면... 나도 알아야 할 것 같구나. 이건 마을 전체와 관련된 일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숨기는 게 이제는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미 반쯤 들킨 상태에서 계속 아니라고 우기는 건 오히려 위험했다. 홍문석은 마을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고, 이미 여기까지 짚어낸 사람 앞에서 더 거짓말을 하는 건 오히려 신뢰를 깨는 짓이었다. "...맞아요." 나는 짧게 인정했다. "제 기프트는, 다른 사람에게 능력이나 지식을 나눠줄 수 있는 거예요." 홍문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벽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기프트는... 들어본 적도 없다."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도 알고 있지?" "알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숨기고 있었어요." 홍문석은 한참 침묵하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도 뭔가 받아볼 수 있느냐."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니면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정작 나온 말은 부탁이었다. "이 마을에는 제대로 된 학문이 없다." 홍문석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오래 묵혀둔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적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네가 정말 그런 걸 줄 수 있다면..." 나는 잠시 생각했다. 홍문석은 이미 마을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학문을 갖추면 마을 전체에 이득이 될 게 분명했다. 아버지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계산이었지만, 결과는 비슷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대상: 홍문석. 신뢰 관계 형성 확인. 스킬 부여 가능. 추천 스킬: 언어학, 수학] "손 좀 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홍문석이 손을 내밀었다. 마른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고, 오래 글을 써온 사람답게 오른손 중지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스킬 부여: 언어학 — 대상: 홍문석] [스킬 부여: 수학 — 대상: 홍문석] 두 개를 한꺼번에 준 건 처음이었다. 홍문석의 몸이 크게 떨렸다.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가 힘없이 풀렸다. "...이건." 눈을 뜬 홍문석의 표정이 낯설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렸다. "문자 체계가... 이렇게도 정리될 수 있구나. 숫자의 배열이 이렇게..." 그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나는 그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그의 몸이 의자에 닿을 때까지 팔을 놓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홍문석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구나." 그날 이후 홍문석은 예배당 안쪽 방에서 밤늦게까지 뭔가를 적었다. 종이가 쌓여가는 소리가 예배당 밖까지 들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며칠 뒤에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랐지만, 홍문석의 말투와 지식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걸 보고는 순순히 아이들을 보냈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홍문석이 나에게 다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진지했다. "네가 준 거라는 건, 나만 알고 있으마." 그렇게 두 번째 규칙이 생겼다. 능력을 받은 사람은 그 출처를 숨긴다. 그게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효과는 사람마다 달랐다. 하은에게 준 정신통일은 감정을 다스리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아버지에게 준 농업과학은 실용적인 기술로 나타났고, 홍문석에게 준 언어학과 수학은 학문적 갈증을 채우는 형태로 발현됐다. 같은 스킬이라도 사람에 따라 결과가 미묘하게 달랐다. [알림: 스킬의 발현 양상은 대상의 자질, 상황, 필요에 따라 조정됩니다. 동일 스킬이라도 대상별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읊었다. 신기하다기보다는, 이건 도구가 아니라 씨앗 같은 거구나 싶었다. 심는 땅에 따라 다르게 자라는 씨앗. 같은 씨앗을 논에 심으면 벼가 되고, 밭에 심으면 다른 게 되는 것처럼.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마을에는 조용한 변화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옆 밭 사람들에게 농법을 알려줬고, 홍문석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예배당 마당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자를 그리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지나가다 봤다. 겉으로 보면 마을 사람들 각자의 노력처럼 보였지만, 그 뿌리에는 내가 있었다. 하은은 나와 아버지, 홍문석 사이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그 애가 물었다. 빨래를 헹구다 말고, 손에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나를 봤다. "너, 계속 이렇게 나눠줄 거야?" "그럴 생각이야." 나는 답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잠깐 그 사이를 채웠다. "이 마을이 좀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 하은은 그 말에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손에 남은 물기를 옷자락에 슥슥 닦으며. "그럼 나도 도울게." 그게 하은과의 세 번째 규칙이었다. 나는 나눠주고, 하은은 그 옆에서 지켜준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오래갈 약속인지, 나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해 말, 마을 어귀에서 최도영이 낯선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다는 소문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최도영이 원래 마을 밖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소문은 아직 별거 아닌 것처럼 취급됐다. 나 역시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신경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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