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탁한 마석의 마도공학자

4화

재료비를 마련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나흘이었다. 나흘.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그 나흘 동안 내가 팔아치운 것들을 생각하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창고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고장 난 구식 마도구 세 대―이젠 고철이나 다름없던 것들을 뜯어내 부품별로 팔았고,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아버지 몰래 서랍 깊숙이 넣어뒀던 개인 소지품들, 어릴 적 어머니가 남겨준 작은 브로치까지도 결국 손에서 놓았다. 브로치를 상인의 손에 넘기던 순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지금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관개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으면, 이 영지의 논밭은 다음 계절에도 똑같이 말라 죽어갈 것이고, 그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겨우 금화 여덟 개. 부족한 액수였다. 이 정도로는 시제품 제작에 필요한 마석 코어 하나도 제대로 구입할 수 없었다. 그때, 최달수 어르신이 나섰다. "아가씨, 이거 쓰십시오." 어르신은 낡은 나무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색이 바래고 균열이 간 마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젊었을 때 모아둔 재곤데, 이제 와서 어디 쓰겠습니까. 아가씨 덕에 쓸모가 생기는 거죠." 그 마석들이 무상으로 넘어오면서, 겨우 시제품 제작이 가능해졌다. 작업은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두 단계 여과 구조를 실제 크기로 구현하는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다. 회로판이 두 번 터졌다. 첫 번째는 전류 과부하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갑자기 불꽃을 튀기며 타버렸다. 마석이 한 번 과열돼 손을 데었을 때는 살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걸 붕대로 감싸며 밤샘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최달수 어르신이 오른팔로 정밀 작업을 하려다 세 번이나 실패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순간은, 솔직히 말해 마음이 무거웠다. 노쇠한 손끝이 미세한 부품 앞에서 자꾸만 흔들렸고, 그럴 때마다 어르신의 얼굴에 스치는 자책감을 못 본 척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늙어서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어르신,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르신 대신 직접 미세 조정을 맡았고, 손끝이 떨릴 정도로 집중해서 회로를 연결했다.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릴 정도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전생에서 배운 회로 지식과 이곳의 마법공학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간극을 메우는 건 결국 시간과 노력뿐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새벽, 마침내 시제품이 완성됐다. 작은 실험용 수조 옆에 시제품을 설치하고, 지역에서 채취한 탁한 마석을 코어에 끼워 넣었다. 코어 표면에는 여전히 흙빛 불순물이 뒤섞여 있었고, 이게 과연 걸러질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최달수 어르신과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으며,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윙― 낮고 안정적인 회전음이 들렸다. 1분... 2분... 5분... 부하 게이지가 붉은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나는 게이지 바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불안정해지면 바로 스위치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됩니다." 최달수 어르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짜로 됩니다, 아가씨." 십 분이 지나도 코어는 태워지지 않았다. 수조 안의 물이 서서히 맑아지는 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전생을 포함해서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전생에서 투자에 성공했을 때도, 이번 생에서 뭔가를 처음 해냈을 때도, 지금 이 감정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어르신, 이거 실전 규모로 만들 수 있을까요?" "시간과 자금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지금 이 크기의 열 배 정도로 키우면, 실제 관개펌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그 순간, 하필이면 며칠 뒤 왕도에서 열리는 계절 사교연회에 참석하라는 통지서가 도착했다.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게 나쁘다. 선진 후작가와 대현상단이 공동 주최하는 자리였으며, 초청장 말미에는 "파혼 관련 사항을 공식적으로 정리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올 것이 왔다. 연회 준비를 하는 이틀 동안, 나는 서재에 틀어박혀 계약서 원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제7조 3항. 일방 파기 시 위약금 조항. 혼약이 성립된 시점에 이 조항을 넣어둔 게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큼 그 조항이 고맙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연회장은 화려했다. 샹들리에 아래 왕도 귀족들이 모여 저마다의 우아함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한도현이 서 있었다. 선진 후작가의 장남이자, 왕도 사교계의 총아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화려한 마도복을 입고서, 옆에는 임소아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대현상단의 영애답게, 최신 유행하는 마도복에 정교한 자수가 새겨진 차림이었으며, 나를 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어머, 청람 변경의 영애님 아니세요?" 임소아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드레스가... 소박하시네요." 소박하다는 말이 그렇게 우아하게 사람을 깎아내리는 표현이었나. 새삼 감탄스러웠다. "변경에서는 화려함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니까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이 드레스 만들려고 재봉사 아주머니가 밤을 새우셨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한도현이 다가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다. "이서린,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우리 혼약, 여기서 정식으로 파기하겠어. 그쪽 영지가 요즘 재정이 어렵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런 곳과 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어졌거든." 주변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공개 석상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파혼을 선언하는 건, 사교계에서도 흔치 않은 무례였다. 몇몇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수군거렸고, 몇몇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눈을 빛냈다. "좋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꺼냈다. "그럼 계약서 제7조 3항에 따라, 일방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청구하겠습니다." 연회장이 순간 얼어붙었다. 한도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뭐?" "파혼 위약금이요. 계약서상 혼수 예정가의 삼 할, 정확히 금화 백이십 개입니다." 임소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런 조항으로 후작가에게 청구하겠다고요? 웃기지도 않네요." "웃기지 않으면 지불하시면 되겠네요." 나는 서류를 한도현 앞으로 내밀었다. "계약서, 양가 대리인 서명까지 되어 있는 유효한 문서입니다. 여기 계신 조달감독관 박현우 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수 있겠죠." 연회장 한쪽에 서 있던 왕실 조달감독관 박현우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중립적이고 냉철한 인상의 남자였으며, 계약과 관련된 공식 자리에는 늘 참석해 기록을 남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왕실 소속답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제가 계약서 사본을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박현우가 서류를 받아 훑어보는 동안, 연회장 안은 정적만 흘렀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의 침묵이었다. 한도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7조 3항, 일방 파기 시 위약금은 혼수 예정가의 삼 할." 박현우가 낮게 읽었다. "양가 대리인 서명 및 왕실 공증 확인. 유효한 계약으로 판단됩니다." 연회장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 웃음의 방향이, 한도현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한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위약금을 그쪽이 청구한다고?" "파혼을 먼저 선언하신 건 도현 님이시죠. 계약 위반은 도현 님 쪽입니다." "이런 시골 영애가..." "시골 영애라도 계약서는 읽을 줄 압니다." 연회장 안의 시선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비웃던 귀족들의 눈빛이, 이제는 한도현을 향한 조소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임소아가 슬그머니 한도현의 팔에서 손을 뗐다. 형세가 완전히 역전됐다는 걸, 그 순간 모두가 직감했다. 한도현은 뭐라도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울 지경이었다. 박현우가 서류에 날짜와 서명을 적어넣으며 나를 잠시 응시했다. "이서린 영애." 그가 낮게 말했다. "이 계약 조항,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던 겁니까?" "물론입니다." 박현우의 눈빛에 짧은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자리를 무사히 넘기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이 조달감독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얼마나 예리하게 파고들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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