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파혼 통보서가 도착한 그날, 청람 변경백작령의 관개 마도펌프가 완전히 멈춰 섰다.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인과율이 억까를 부리는 것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나는 이서린, 청람 변경백작 이한성의 유일한 딸이자 선진 후작가 장남 한도현과 삼 년 전부터 혼약이 맺어져 있던 몸이었으며, 동시에 전생에는 강하은이라는 이름으로 삼십 대 중반까지 중소 제조업체를 굴려먹던 기업가였다는 사실을, 이 세계 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서류를 받아든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선진 후작가 → 청람 변경백작가] "양가의 사정을 고려하여 혼약을 파기함을 통보드립니다. 위약금 관련 사항은 추후 사교계 공식 석상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짧고, 무례하고, 통보문치고는 지나치게 상투적이었다.
세 줄짜리 문장 안에 담긴 무성의함이 오히려 눈에 밟혔다. 삼 년을 함께한 사이에, 만나서 얘기 한 번 하자는 말도 없이, 인편으로 종이 한 장 던져놓고 끝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창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이었으며, 나는 서류를 손에서 놓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관개용 수로 끝, 낡은 목조 수차와 나란히 서 있던 청동빛 마도펌프가, 평소와 다른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회전을 멈추고 있었다.
덜컹, 끄으윽, 텅.
그리고 침묵.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 펌프가 어떤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지, 나는 지난 반년간 창가에 서서 지겹도록 들어왔다. 아침 여섯 시면 규칙적으로 울리던 웅웅거리는 저음, 정오 무렵 살짝 톤이 높아지는 회전음, 저녁이 되면 다시 낮아지는 리듬까지. 그런데 지금 이 소리는, 그 익숙한 패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청람 변경백작령의 유일한 관개 시설이 저 마도펌프 하나에 전부 걸려 있다는 걸, 이 영지에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계절 수확량의 삼 할이 이미 흉작이었고, 아버지 이한성이 왕도 상인들에게 갚아야 할 부채가 은화로 환산하면 어지간한 백작가 일 년 세수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그 부채의 대부분이 다름 아닌 이 펌프의 유지보수 비용에서 발생했다는 걸 떠올리자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계산이 이미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지난 시공 보고서 기준으로 부품 하나 교체에 금화 서른 개, 여기에 왕도 기술자 출장비 금화 다섯 개, 도합 서른다섯. 이번엔 또 무슨 부품이 나갔을지 몰라도, 최소 그 이상은 각오해야 했다.
"서린아." 아버지가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얼굴은 이미 장례식장 상주 얼굴이었다. "펌프가... 또 멈췄다는구나."
"압니다. 방금 봤어요."
"어쩌면 좋으냐. 지난번에 왕도에서 온 기술자가 부품을 갈아줬는데도 벌써..."
지난번이라 해봐야 겨우 두 달 전이었다.
두 달. 겨우 두 달 만에 또 고장이라니. 전생에 내가 굴리던 공장에서도 이런 식으로 같은 부위가 반복 고장 나면, 그건 부품이 문제가 아니라 설계나 시공 자체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서류철을 뒤졌으며, 두 달 전 왕도 마도구상단연합에서 파견 나온 기술자가 남긴 시공 보고서를 다시 훑었다.
부품 교체 비용 금화 서른 개, 출장비 금화 다섯 개, 도합 서른다섯.
그리고 이번엔 또 얼마를 부를지, 상상만 해도 위산이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보고서 하단, 기술자 서명 옆에 작게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핵심 마정석 노화 진행 중, 차기 교체 권장." 차기 교체라 함은 결국 또 서른다섯을 내라는 뜻이었으며,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같은 액수를 반복해서 뜯길 거라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영지 재정이 먼저 고사할 판이었다.
"게다가 오늘..."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선진 후작가에서 서신이 왔다고 하던데."
"받았어요."
"뭐라 하더냐?"
"파혼이라네요."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 그게 무슨... 위약금 조항이 있는 계약이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알아요. 계약서 내용, 제가 다 외우고 있어요."
전생의 나, 강하은이었다면 이런 순간에 제일 먼저 계약서를 다시 펼치고 조항 번호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랬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혼약 계약서를 꺼내 다시 읽었으며, 제7조 3항, 일방 파기 시 위약금은 혼수 예정가의 삼 할이라는 조항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자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됐다. 이건 나중에 써먹으면 된다.
한도현, 네가 먼저 종이 한 장으로 끝내겠다고 나온 거, 두고 봐라. 삼 할이 얼마인지 계산기 두드려 줄 테니까.
지금 당장 급한 건 저 멈춰버린 마도펌프였다.
파혼이야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사람은 굶어 죽지 않지만, 논밭이 마르면 그해 농사는 그냥 끝이었다. 우선순위를 착각해서는 안 됐다.
"아버지, 지금 공방장 최달수 어르신 어디 계세요?"
"공방에... 있을 거다만."
"펌프 부품, 이번엔 갈지 마세요."
"뭐?"
"제가 먼저 보고 판단할게요."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딸이 마도구를 안다고? 라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으며, 나는 그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전생의 삼십오 년 인생 중 이십 년을 기계와 씨름했다.
공장 라인이 멈추면 밤을 새워서라도 원인을 찾아냈고, 부품 하나 값을 아끼려고 발주처와 몇 시간씩 싸운 적도 있었다.
한번은 압축기 하나가 원인불명으로 사흘에 한 번씩 셧다운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다들 부품 문제라며 새 걸 사자고 했지만, 결국 원인은 냉각수 배관 각도가 미세하게 잘못 시공된 데 있었다. 부품값 수천만 원을 아낀 그 경험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 경험이, 이 낯선 세계의 마도구에도 통할지는 아직 몰랐다.
마도구는 결국 마정석이라는 동력원과 기계식 구조가 결합된 물건이었고, 원리를 뜯어보면 전생의 기계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감이 있었다. 물론 감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 했다.
왕도 상인들이 부르는 값을 그대로 지불하다가는, 이 영지가 먼저 무너질 게 뻔했으니까.
세 달 전 서른다섯, 이번엔 아마 마정석까지 갈면 오십을 넘길 것이다. 다음엔 또 얼마, 그다음엔 또 얼마. 이런 식으로 계속 뜯기다 보면 재정이 먼저 바닥날 게 눈에 보였다.
공방으로 가는 길, 마른 흙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치맛자락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파혼 통보 때문인지, 펌프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저 멀리 공방 지붕 위로 검은 연기가 살짝 피어오르는 게 보였고,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연기라니. 단순 정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뭔가 타고 있다는 신호였고, 그건 최악의 경우 마정석 과부하로 인한 발화일 수도 있었다. 전생에 공장에서 딱 한 번, 전기 패널이 타는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탄내에 병적으로 민감해졌다.
무언가가 벌써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며,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