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공방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익숙한 쇳내와 마석 특유의 비릿한 냄새 대신 낯선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왕도풍의 화려한 자수 조끼를 입은 남자였다.
손목에는 금장 시계를 채우고, 손에는 두꺼운 청구서 묶음을 든 채로, 최달수 어르신을 상대로 뭔가를 언성 높여 요구하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어찌나 당당한지 마치 이 공방이 자기 소유물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이번 부품은 지난번보다 등급이 낮은 걸 썼으니 손상이 더 빨리 온 겁니다. 저희 쪽 실수는 인정하지만, 재교체 비용은 규정대로 청구해야죠."
"규정이 어디 있소. 두 달 전에도 새 부품이라 했잖소."
"새 부품이었죠. 다만 변경령 환경에 맞는 특수 사양이 필요했던 걸 저희가 미처 안내 못 드린 겁니다. 그러니 이번엔 특수 사양 부품으로, 금화 오십 개입니다."
금화 오십.
숨이 턱 막혔다.
지난번의 서른다섯보다 열다섯이나 더 뛴 금액이었으며, 그 열다섯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되며 맴돌았다.
서른다섯, 마흔, 쉰. 서른다섯, 마흔, 쉰.
이런 식으로 매번 사양이 바뀌었다며 청구액을 올리는 게 이 사람들의 상습적인 수법이라는 걸, 나는 그 순간 완벽하게 확신했다.
전생에서 하도급 업체 사장들이 원청 상대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걸 수십 번은 봤으니까.
기술 용어로 포장한 뒤 애매하게 말을 흘리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지갑을 여는 법이었다.
"잠깐만요." 나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제가 청람 변경백작의 딸 이서린입니다. 지금 청구하신 내역, 자세히 좀 봐야겠는데요."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열여덟 살 여자애가 뭘 안다고, 라는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랐으며, 입가엔 얕은 비웃음까지 걸려 있었다.
"아가씨, 이건 기술적인 문제라서요. 백작님께 직접..."
"백작님은 지금 안 계시고, 제가 위임받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도 태연했다.
거짓말이란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전생에서 회의 때마다 상사 눈치 보며 벌벌 떨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상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나는 그의 손에서 청구서를 낚아채 훑어봤다.
특수 사양 부품, 마석 정제도 조정 회로, 출장 및 긴급 대응비.
항목만 나열했을 뿐 근거가 되는 수치는 하나도 없었다.
금액만 있고 이유는 없다.
이건 뭐, 초등학생도 안 속을 견적서였다.
"이 회로가 왜 필요한지 설명해주시겠어요?"
"그건... 변경령의 마석 품질이 워낙 낮아서, 표준 회로로는 부하가 걸립니다."
표준 회로로는 부하가 걸린다.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종을 울리듯 크게 반향했다.
부하, 부하, 부하.
전생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단어가 이 세계 마법 부품에서도 똑같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문제는, 저희 지역 마석이 왕도 표준보다 순도가 낮아서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표준 부품 자체가 우리 환경엔 안 맞는다는 거고요, 애초에 지난번 시공 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표준 부품을 팔았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안면 근육이 노골적으로 경직되는 게 보였고, 청구서를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당황했구나.
"그, 그건 아가씨가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적인..."
"이해합니다. 정확히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최달수 어르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멈춘 펌프 부품 좀 봐도 될까요?"
최달수 어르신은 나를 잠시 멀뚱히 쳐다보다가, 오른팔을 어색하게 늘어뜨린 채 안쪽 작업대로 나를 이끌었다.
어르신의 오른팔은 오래된 화상 흉터로 손가락 세 개가 제대로 펴지지 않았으며, 세밀한 작업이 불가능해진 지 벌써 십 년째라고 들었다.
그래도 이 공방에서 가장 마도구를 오래 다뤄본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작업대는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온갖 크기의 렌치와 니퍼가 순서대로 걸려 있는 모습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게 이 일을 해왔는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작업대 위에 놓인 부품을 들어 살펴봤다.
청동색 외피에 감싸인 마석 코어,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조정 회로가 눈에 들어왔으며, 나는 손끝으로 마석의 표면을 조심스레 문질러봤다.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미세하게 거칠었다.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마치 사포를 문지르는 것 같았다.
불순물이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건 단순히 여과 필터가 막혀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펌프의 유량 센서가 이물질을 걸러내지 못해서 부하가 걸리고, 그 부하가 회로에 과전류처럼 작용해 코어를 태워버리는 구조.
금속 재질과 전류의 관계는 다르겠지만, 마석과 마력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비슷한 원리일 수 있었다.
원리는 세계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이 회로... 여과 구조가 있나요?"
최달수 어르신이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제 짐작이 맞으면요, 왕도 표준 부품엔 고순도 마석용 여과 구조만 있고, 저순도 마석, 그러니까 우리 지역 마석 같은 걸 걸러낼 만한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자꾸 막히고, 막히니까 부하가 걸리고, 부하가 걸리니까 태워먹는 거고요."
"그,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파는 부품은 원천적으로 우리 지역에 안 맞는다는 뜻이죠."
최달수 어르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십 년 동안 부품이 자꾸 망가지는 게 다 자기 손재주 탓인 줄로만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왕도 상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가씨, 그런 임의적인 추측으로..."
"임의적인 추측이 아니라면, 제대로 설명해보시죠. 지난 시공 때 특수 사양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몰랐나요?"
침묵이 잠시 흘렀다.
남자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는 식은땀 같은 게 얇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답은 정해진 것 같네요."
나는 청구서를 다시 그에게 밀었다.
"이번 청구, 재검토 없이는 못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부품값도 정당한지 다시 따져야 할 것 같고요."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붉었다가, 창백했다가.
색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웃음이 났지만, 참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만, 이 일은 상단연합 본부에 보고할 겁니다."
"그러세요. 저도 이 청구서, 제 아버지께 그대로 보고할 테니까요."
말은 뻔뻔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떨렸다.
이게 통할까, 아니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그가 떠난 뒤, 공방 안에는 정적만 남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최달수 어르신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가씨,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겁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전생에서 배웠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전생에 하도급 사기꾼들 상대로 매번 견적서 뜯어보고 싸우다가 배웠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지는 걸 좋아했어요."
어색한 거짓말이었지만, 최달수 어르신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조금 신기하다는 듯 나를 한 번 더 훑어보곤, 낡은 부품을 다시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그럼 이거, 직접 뜯어보시겠습니까."
부품을 받아든 순간, 손끝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마석의 잔열이었으며, 나는 그 진동을 느끼며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이건, 기회였다.
부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작업대 위에 놓인 다른 부품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낡고 녹슨 것들, 그중 몇 개는 겉보기에도 심각하게 손상돼 있었으며, 이 모든 게 왕도 상단이 팔아치운 표준 부품들이라는 사실이 새삼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 공방 하나만 이런 게 아닐 거란 생각이 스쳤다.
변경령 전체가, 이런 식으로 매년 얼마나 많은 금화를 왕도 상단에 헛되이 갖다 바치고 있었을까.
최달수 어르신이 도구함에서 낡은 니퍼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조심하십쇼. 마석 코어는 잔열이 남아 있어도, 잘못 건드리면 손끝이 델 수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니퍼를 받아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