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부터 밭일이었다.
이도윤은 호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흙을 갈랐다. 아직 해가 완전히 오르기 전이라 흙은 차가웠고, 그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전해졌다.
열여덟, 정확히는 몸의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속에 든 기억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억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 몸, 이 이름, 이 삶이 이미 그의 것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긴다.' 그것이 도윤이 십 년 넘게 지켜온 원칙이었다.
말을 하려 하면 목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렸다. 단어들이 순서를 잃고 뒤엉켰다. 상대의 눈을 마주치면 그 증세는 더 심해졌다. 처음엔 그저 낯가림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낯가림이 아니라는 걸 도윤 자신도 알게 되었다. 몸이 말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전생의 습관인지, 이번 생의 결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윤은 눈을 피했고, 말을 줄였고, 결국 마을 사람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함께 놀자고 다가온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윤은 대답 대신 고개만 젓고 자리를 떴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도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이 편했다. 적어도 도윤은 그렇게 믿었다.
"도윤아." 이광수가 밭 언저리에서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의 목소리엔 특별한 억양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윤을 편하게 했다. 이광수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한 말만 했고, 필요 이상으로 캐묻지 않았다. 도윤이 유일하게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상대였다.
"오늘은 그만하고 들어가 쉬어라."
"...네." 도윤이 짧게 답하고 호미를 내려놓았다.
허리를 펴자 등줄기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몸은 열여덟 살의 것이었다. 근력도, 지구력도, 하다못해 굳은살조차 이제 막 밭일에 적응해가는 소년의 것이었다. 그러나 감각만은 달랐다. 특히 무언가를 쥐는 순간, 몸은 낯설 만큼 익숙한 반응을 보였다.
전생의 기억은 흐릿했다. 이름도, 얼굴도, 심지어 어떤 세상이었는지도 이제는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검을 쥐던 감각만은 몸 어딘가에 뿌리처럼 박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적 없는 자세가 손끝에서 저절로 나왔다. 어느 날 처마 밑에서 죽은 나무막대를 주워 든 순간, 도윤은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았다.
그날을 도윤은 또렷이 기억했다. 여섯 살이었나, 아니면 일곱이었나. 나무막대를 쥐자마자 손목이 저절로 돌아갔고, 발끝이 저절로 자리를 잡았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도윤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몸에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재능을 자랑한 적이 없었다. 자랑하려면 말을 해야 했고, 말을 하려면 사람들 앞에 서야 했다. 도윤에게는 그 순서 자체가 재앙이었다. 재능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으면 재능이 아니었다. 도윤은 그렇게 믿었고, 그 믿음대로 살았다.
이광수는 가끔 아들이 나무막대를 휘두르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무엇을 배웠느냐, 어디서 배웠느냐,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살아있고, 밥을 먹고, 밭을 갈고,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석 달 전, 마을에 관리 한 명이 찾아왔다. 왕국이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마나 감별이었다. 해마다 한 번, 관리들이 마을을 돌며 아이들의 몸에 흐르는 마나 수치를 측정했다. 대부분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수치가 낮으면 그냥 지나갔고, 평범한 수준이면 서류 한 줄에 적혔다가 잊혔다.
관리는 손목에 얇은 수정판을 대었고, 판이 순간 새하얗게 빛났다.
"이런 숫자는..." 관리가 낮게 중얼거리며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관리가 몇 번이나 수정판을 다시 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측정값이 오류인지 확인하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도윤은 그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숫자가 크든 작든, 도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살면 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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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마차 소리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들렸다.
말발굽 소리는 셋이었다. 갑주를 두른 기사 셋이 도윤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갑주는 흙먼지 하나 없이 반짝였고, 그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이 작은 마을에 이런 이들이 찾아오는 일은 평생 한 번도 없었다.
"이도윤이 누구냐." 앞장선 기사가 물었다. 억양에 하대가 섞여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태도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저입니다." 도윤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기사의 시선이 도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흙 묻은 옷, 굳은살 없는 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이 기사의 눈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사는 서류를 펼쳐 보였다. 왕실 문양이 찍힌 그 종이에는 도윤의 이름과 마나 수치, 그리고 '즉시 청명 검술학원으로 송치할 것'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글자는 붉은 인장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그 붉음이 유독 도윤의 눈에 오래 남았다.
"이게 무슨..." 이광수가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십수 년을 함께 살며 도윤이 처음 듣는 떨림이었다.
"법이다." 기사가 무심하게 답했다. "일정 수치 이상은 학원 입학이 의무다. 거부하면 가문 전체가 죄를 진다."
기사의 말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반복해서 해온 말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완전히 굳어버린 어조였다.
"수치가 얼마나 되기에..." 이광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부친이 알 필요 없는 정보다." 기사가 서류를 다시 접었다. "시간이 없다. 준비할 것이 있으면 지금 하도록."
도윤에게는 가문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어머니는 도윤이 기억을 갖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형제도, 친척도 없었다. 이광수와 도윤, 단둘이 이 작은 집을 지켜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을 방패로 세워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 전체가 죄를 진다는 말이, 결국 이광수 한 사람이 그 죄를 짊어진다는 뜻이라는 것도.
"제가 가겠습니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 말을 마치기까지 숨을 세 번은 삼켰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기사가 처음으로 도윤을 다시 보았다.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보통 이 나이의 아이들은 울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부모의 뒤에 숨었다. 순순히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말은 잘 못해도 결정은 빠르구나." 기사가 짧게 웃었다. 조롱인지 감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이광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들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도윤은 그 떨림을 못 본 척했다. 지금 그것을 인지하면 자신도 무너질 것 같았다.
"몸 성히 있어라."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몸은 성할 겁니다.' 도윤은 속으로 그렇게 답했다. '문제는 늘 입이니까요.'
기사 하나가 짐을 챙기라며 도윤을 재촉했다. 도윤에게 짐이라 할 것도 많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 두 벌, 아버지가 예전에 깎아준 나무막대 하나. 그것을 작은 보퉁이에 싸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자꾸만 시간을 늘리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차에 오르며 도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고, 그는 그 무너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광수가 마당 끝에서 계속 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윤은 시선을 앞으로만 두었다.
마차가 흙길을 흔들며 나아갔다. 도윤이 아는 세상의 끝, 그 너머로. 마차 안은 좁았고, 맞은편에 앉은 기사는 별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도윤에게는 다행이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윤은 조금씩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창밖으로 마을의 지붕들이 점점 작아졌다. 흙길이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풍경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윤은 무릎 위에 올려둔 보퉁이를 꽉 쥐었다. 그 안에 든 나무막대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어렴풋이 전해졌다.
검술학원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낯선 것은 늘 두려움과 함께 왔다. 학원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지, 그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입을 열어야 할지, 상상만으로도 목 안쪽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가서 조용히 있으면 된다.' 도윤은 그렇게 되뇌었다. 눈에 띄지 않고, 말을 줄이고,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십 년 넘게 지켜온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면 된다고.
하지만 그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 다짐이었는지,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마차는 계속 흔들리며 나아갔다. 흙먼지가 창틈으로 스며들었고, 도윤은 그 먼지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