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철갑 속에 핀 은월

4화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남은 집들 중 하나에 모여들었다. 불에 타지 않은 곡물창고였다. 지붕 한쪽이 그을려 있었지만, 벽은 그대로 서 있었다. 안에는 짚더미와 낡은 등불 하나가 있었다. 등불의 심지가 다 타들어 가는지, 불빛이 자꾸 흔들렸다. 바람이 문틈으로 새어들 때마다 그 빛이 훅, 흔들리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소녀들은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짚더미 위에, 혹은 흙바닥 위에 그냥 주저앉은 아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음은 이미 다 쏟아낸 뒤였다. 누군가는 무릎을 끌어안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나는 창고 입구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열두 명인가.) 손가락으로 대충 세어봤다. 금발의 소녀, 자주색 머리에 작은 산양뿔이 난 소녀, 고양이 귀를 가진 어린아이, 그리고 나머지. 다들 나이도, 생김새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아이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신발도 없이 맨발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이 애들이 오늘 하루만 이랬을 리 없지.) 금발 소녀가 먼저 다가왔다. 눈이 새파랬고, 귀 끝이 뾰족했다.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는데, 그럼에도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나선다는 게 느껴졌다. "저는 다은이에요. 서다은." 그녀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당신이… 저희를 구해주신 거죠?" 나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현입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에요." 대답이 어설프게 나왔다. 스스로도 그게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 한 마리를 때려눕히고 나서 지나가던 사람이라니. 다은은 그 대답에 오히려 더 밝게 웃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저 용을 이겼다고요?"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지만, 눈가는 아직 붉었다. 울다가 웃는 얼굴이란 게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로 자주색 머리의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뿔이 이마 양쪽으로 작게 돋아 있었다. 걸음마다 다은의 뒤에 반쯤 숨듯이 걷는 게 느껴졌다. "유하늬예요." 그녀는 다은보다 훨씬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시선이 자꾸 아래로 향했다. (뭔가 조심스러운 느낌인데.) 나는 그 미묘한 거리감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하늬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어깨를 미미하게 늦췄다. 창고 안은 조용했다. 가끔 짚더미가 뒤척이는 소리,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그림자들도 함께 흔들렸다. 그 정적이 오히려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다은과 하늬에게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곤 대륙이라 불리는 곳이라고 했다. 인간, 엘프, 디코론족, 그리고 여러 아인종이 함께, 혹은 따로 살아가는 땅. 그리고 이 은월촌은, 강선영이라는 여자가 노예로 팔려 다니던 소녀들을 하나둘 사들여 풀어주고, 함께 세운 마을이라고 했다. "선영 언니는… 원래 이 근처 영지의 기사였대요." 다은이 짚더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고, 저희 같은 애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손끝으로 짚더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저 혼자였어요. 그러다 한 명, 두 명 늘어난 거예요." 하늬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저를 산 것도 언니였어요. 삼 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때는… 저도 말을 잘 못했어요. 사람이 무서워서."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삼 년 동안 지켜온 걸, 하룻밤에 잃은 거구나.)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등불 불빛 아래, 하늬의 작은 뿔이 희미하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가 흙바닥 위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근데…" 다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선영 언니는 지금 어디 있어요?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그 순간, 창고 안의 공기가 확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지.) 나는 그저 시선을 피하듯 창고 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창고 구석에는 고양이 귀를 가진 어린 소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였다. 다은이 그쪽을 보며 작게 말했다. "하리예요. 아직 어려서 말을 잘 안 해요." 나는 그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리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고양이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저 나이에… 이런 걸 겪다니.)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다가가도 될지 망설였다. 결국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그 작은 어깨가 떨리는 걸 지켜만 봤다. 나는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훈련 중 사고로 동료 하나를 눈앞에서 잃었던 그날. 그날도 이렇게 조용한 밤이었다. 소리도 없이, 그저 늦었다는 사실만 남았던 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몇 달 동안 나를 갉아먹었다. 잠을 자다가도 그 장면이 떠올라 벌떡 일어난 날이 몇 번이었는지 셀 수 없었다. (그때도 이랬지. 늦었다는 생각만 남았어.) 지금도 그 감각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느낌마저 그때와 똑같았다. 나는 그 감정을 애써 눌러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불 아래 앉아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나를 향했다. "사갈의 시체를 좀 살펴봐야겠어요." 다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사갈이요?" "저 용… 이름이 있었나요?" 하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염용국 소속 용들은 다 이름이 있어요. 유명한 놈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고요." 그녀는 잠시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조금 있다 다시 올게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창고 밖으로 나섰다. 등 뒤로 다은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문을 나서기 직전, 하리 쪽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아이는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나는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불에 탄 잔해 냄새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발밑으로 부서진 기왓장 조각이 밟혔다. 탁, 탁.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달빛 아래 사갈의 거대한 사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검붉은 비늘이 달빛을 받아 어둡게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크기가 새삼 실감 났다. 쓰러진 채로도 나보다 몇 배는 큰 몸통이었다. 날개는 반쯤 접힌 채 땅에 늘어져 있었고, 그 끝자락이 흙바닥을 깊게 파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비늘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비늘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마치 젖은 돌 같았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훑어 내려가다, 손이 멈췄다. (뭔가… 상처가 아니라 표식 같은 게 있는데.) 비늘 사이, 목덜미 아래쪽에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연스러운 상처나 흉터라기엔 선이 너무 규칙적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새겨넣은 듯한 형태였다. 나는 손끝으로 그 문양을 천천히 따라갔다.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그냥 우연히 생긴 게 아니야.)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뭇잎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사이로, 뭔가 낯선 파문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문양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숙였다. 달빛이 비늘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 순간, 문양의 형태가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하지만 어딘가 낯설지만은 않은 문양이었다. (이거…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는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스쳤을 뿐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사갈의 사체 위로 달빛만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 문양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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