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강서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강서은의 손짓 하나에 문밖으로 밀려났다. 창을 든 채로,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놈들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강서은은 여전히 성녀였다. 등을 곧게 펴고, 눈빛 하나로 사람을 물러나게 만드는.
문이 닫히고, 우리 둘만 남았다.
방 안엔 아직 탄 냄새가 남아 있었다. 재가 된 남자의 흔적이 바닥에 얇게 깔려 있었다. 나는 그걸 밟지 않으려고 애써 발을 옆으로 옮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신경 쓰이냐.'
신경 쓰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먼저 칼을 들었어."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막으려고 했을 뿐이야."
변명 같았다. 나 스스로 들어도.
'그래서 뭐, 사람을 재로 만드는 게 정당방위야?'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당방위든 뭐든, 사람이 눈앞에서 가루가 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강서은은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내가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잡았다. 손끝에 아직 남아 있던 검은 기운이, 강서은이 만지자 슥 가라앉았다.
"손 데었어?"
엉뚱한 질문이었다.
'지금 그게 궁금해?'
"안 데었어."
"그럼 됐어."
그럼 됐다니. 사람 하나가 재가 됐는데.
그 말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마음이 이상하게 놓였다. 강서은은 늘 이런 식이었다. 큰 걱정은 속으로 삼키고, 작은 걸 먼저 물었다.
강서은은 그 뒤로도 한동안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손끝으로 내 손등을 가만히 쓸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손이었다.
"나 신전에서 오래된 기록을 본 적 있어."
마침내 강서은이 입을 열었다.
"마왕은 세계의 법칙 밖에 있는 존재래.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대. 그리고 그 마왕을 처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말이 뚝 끊겼다.
"성녀지."
내가 대신 이어 말했다.
강서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게 말이 돼?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나는 웃으려고 했다.
실패했다.
'웃긴 게임이네. 진짜.'
같은 사고로 같은 세계로 떨어진 두 사람이, 하필 서로를 죽이고 살려야 하는 관계로 배정됐다.
누가 이런 시나리오를 짰는지 몰라도, 취향이 아주 고약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떨어진 그 순간부터 이상했다. 같은 버스, 같은 사고, 같은 순간에 눈을 감았는데 왜 하필 우리 둘만 이 세계로 왔을까. 그리고 왜 하필 한 명은 성녀, 한 명은 마왕이었을까.
'신은 있으면 대답이나 좀 해봐라.'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강서은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잠깐이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다시 몸을 뗐다.
"괜찮아. 방법이 있을 거야."
있을 리가.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강서은이 신전에 이야기했고, 대신 나는 신전 소속 관리 대상이 됐다. 감시는 더 심해졌지만, 적어도 방문 아래로 밥이 들어오는 삶은 끝났다.
쟁반이 문틈으로 슥 밀려 들어오는 그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됐다.
그 대신 다른 게 시작됐다.
나는 상처가 나면 그 즉시 아무는 걸 알게 됐다.
부엌에서 손을 베였는데, 피가 나오는 것도 잠깐, 상처가 순식간에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와, 이거 완전 사기 능력인데.'
신나서 몇 번 다시 베어봤다가 신전 사제한테 딱 걸려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봄을 당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사제가 물었다. 손에 든 식칼과 내 손등에 남은 붉은 자국을 번갈아 보면서.
"실험이요."
"실험이라니요."
"금방 나아요. 보실래요?"
사제는 대답 대신 뒷걸음질을 쳤다. 그 표정이 마치 괴물을 본 것 같았다.
'그러게 좀 잘 살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는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다음엔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남아 있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그걸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반,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밤마다 관사 뒷마당에 나가 돌 위에 손을 올려놓고 힘을 줘본 적도 있었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결과는 늘 같았다. 뼈가 붙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이미 멀쩡했다. 통증만 잠깐, 흔적은 아예 없었다.
'이거 진짜 사람 맞나.'
사람이 아니니까 이러겠지. 마왕이니까.
기록에 따르면 마왕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이 다 맞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혹시 방법이 있다면.
혹시 정말로 사라질 수 있다면.
강서은이 처단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서은이 성녀로서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 결국 내 목숨을 거두는 그날이 온다면.
그건 강서은에게 살인이 아니라 사명이 되겠지만, 나는 그 사명이 강서은을 어떻게 갈아버릴지 이미 알 것 같았다.
강서은은 원래도 자기 몸을 잘 안 돌보는 사람이었다. 신전에서 밤낮으로 기도문을 외우다 코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 남을 치유하느라 자기가 먼저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손으로 나를 죽여야 한다면.
그 이후의 강서은은, 지금의 강서은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 꼴은 못 봐.'
그날 밤, 나는 신전 관사의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달이 유난히 밝았다.
손끝에 남은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힘이 언제 또 폭주할지, 언제 또 누군가를 재로 만들지,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달빛에 비춰봤다. 검은 기운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 나왔다가, 곧 다시 스며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너는 대체 뭔데 내 몸에 붙어 있는 거야.'
대답할 리 없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다음 날, 나는 신전 서고에서 오래된 예언서를 몰래 훔쳐봤다.
서고는 늦은 오후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적었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가장 안쪽, 먼지가 두껍게 쌓인 책장을 뒤졌다.
손이 살짝 떨렸다. 이런 걸 뒤지다 걸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짐작도 안 갔다.
『성녀가 마왕을 처단하는 날, 세계는 다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그 아래로 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단, 마왕이 스스로 소멸을 택하지 않는 이상, 성녀는 반드시 마왕을 살해해야만 그 소명을 완수할 수 있다.』
스스로 소멸.
그 문장이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나는 그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가 눈에 익어서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스스로 소멸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데.'
방법도 안 알려주고 저렇게만 적어놓으면 어쩌라는 건지.
그 순간, 서고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예언서를 서둘러 책장에 다시 꽂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발소리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