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으려 했는데, 마왕이었다

1화

화분에 물을 주다가 잎이 시드는 걸 본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손끝이 닿은 자리부터 시작해서, 잎맥을 따라 색이 빠지고, 결국 통째로 말라붙었다. '또 시작이네.' 나는 마른 잎을 뜯어 창밖으로 던졌다. 바람이 없는 날이라 잎은 그대로 창틀 아래로 떨어졌다. 아마 내일이면 저 아래 어디쯤엔가 흩어져 있겠지. 누가 치우기는 할까. 이 탑에서 청소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계속 쌓이는 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탑에 갇힌 지도 벌써 두 해가 다 되어간다. 회색 탑,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정확히는 아무도 이 탑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다들 그냥 저기, 저 위, 하는 손짓으로 대신했다. 이름조차 붙이기 싫은 건물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다들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나는 한유리다. 원래는 서울 어느 대학교 4학년이었고, 자취방에서 강서은이랑 밤새 게임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 탑의 삼층, 낡은 침대 위였다. 처음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두 해가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 탑 삼층에서 화분을 돌보고 있다. 밥은 하루 두 번, 시녀가 문 아래로 밀어넣어 준다. 얼굴은 본 적 없다. 목소리만 들었다. "식사 두고 갑니다." 그게 전부였다. 처음엔 대답이라도 해봤다. "저기요, 잠깐만요." 해도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멀어졌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그냥 관뒀다.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는 법이 없었으니까. 왜 갇혀 있는지,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냥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이 방이었고, 문은 밖에서만 열렸다. 손잡이도 없었다. 안쪽에서 보면 그냥 매끈한 나무판일 뿐이었다. 손끝의 그 이상한 힘을 처음 느낀 건 이곳에 온 지 반년쯤이었다. 시녀가 넣어준 빵에서 벌레가 나온 걸 보고 짜증이 나서 손으로 확 눌렀는데, 그 벌레가 그대로 재가 되어버렸다. 타지도 않았는데. 그냥, 재. '와.' 나는 그날 밤새 잠을 못 잤다. 침대에 누워서 손바닥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른다. 뭐가 달라 보이나 해서. 딱히 다를 건 없었다. 그냥 내 손이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이런 게 게임 속 스킬이라면 인벤토리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 그런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전설급 스킬 - 접촉 부패. 효과: 만지면 죽음.' 뭐 이런 식으로.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화분의 꽃이 시들고, 실수로 만진 나무 문틀이 부스러졌고, 한번은 창틀에 앉은 새를 쫓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 새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게 뭔데.' 새를 주워서 창밖으로 던질 때 손이 떨렸다. 죽은 게 미안해서였는지, 내가 그걸 했다는 게 무서워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겠지.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시녀는 목소리만 들리는 존재였고, 그 목소리도 늘 같은 말만 했다. 식사 두고 갑니다, 그뿐. 가끔은 벽에다 대고 혼잣말을 했다. "저기요, 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벽은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지, 벽인데. 강서은은 이곳에서도 강서은이었다. 같은 사고로 함께 이 세계에 떨어졌는데, 나와 달리 그 애는 처음부터 신전의 사람들에게 발견됐다고 했다. 몸에서 흰 빛이 났다더라, 상처가 저절로 아물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벌써 이 탑 아래층까지 퍼져 있었다. 백은의 성녀. 그게 이 세계 사람들이 강서은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갑기도 했고, 동시에 어쩐지 멀어진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성녀고 나는 죄수라니.' 웃기지도 않는 조합이었다. 같이 밤새 게임하다가 떨어진 사이인데, 한 명은 신전 꼭대기에서 흰옷 입고 사람들 축복해주고, 한 명은 회색 탑에 갇혀서 화분이나 죽이고 있다니. 신은 있다면 참 편애가 심한 것 같다. 시녀가 밀어넣어준 밥그릇에는 오늘도 빵 한 조각과 묽은 죽이 담겨 있었다. 나는 죽을 몇 술 뜨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그날 오후, 문 아래로 편지 한 장이 밀려들어왔다. 낯익은 필체였다. 『유리야, 이번 주에 시간 내서 갈게. 조금만 기다려.』 짧은 문장 하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강서은이 나를 찾아온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해 동안 편지만 몇 번, 그것도 신전을 통해서 검열된 것처럼 짤막하게 오간 게 전부였는데. 대체 무슨 얘기를 몇 줄 안에 압축해서 보내야 했는지, 편지지엔 늘 새로 다듬은 것처럼 깔끔한 글씨만 있었다. 검열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고 나는 늘 짐작만 했다. '왜 갑자기.'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 자국으로 눌려 우그러졌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다. 서은이 얼굴을 실제로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사고 나기 전날 밤, 라면 끓여 먹으면서 게임하다가 같이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 세계에서는 두 해째 얼굴 한 번 못 본 셈이었다. 그다음엔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일까? 성녀가, 죄수를 찾아온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오랜 친구를 만나러 오는 것뿐이겠지만, 이 세계에서 백은의 성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냥 개인적인 일로 넘어갈 리 없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성녀가 회색 탑에 갇힌 죄수를 만나러 온다.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다. 신전 사람들이 그걸 그냥 두고 볼 리도 없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오는 걸 거다,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좋은 이유일 것 같지는 않다는 확신이 뒤따라왔다. '그냥 보고 싶어서 온다는 게 말이 안 되나.'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세계에서 두 해를 보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이유 없는 일은 없다는 거였다. 특히 나한테 일어나는 일 중에는. 나는 편지를 접어 침대 밑, 낡은 나무판 사이 틈에 밀어넣었다. 원래 거기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숨길 게 하나 생긴 셈이었다. 그날 밤, 나는 또 화분에 손을 댔다가 남은 꽃 한 송이를 시들게 했다. 원래는 그냥 흙을 매만지려던 거였다. 손끝이 잎에 스쳤을 뿐인데, 색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아, 또 이러네. 나는 짜증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달빛 아래서 검게 말라가는 꽃잎을 보며, 나는 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게 대체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들게 하는 힘. 죽이는 힘. 이름을 붙인다면 그런 식이 될 텐데, 그렇다면 강서은이 가진 그 흰 빛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무언가였다. 같은 날, 같은 사고로 떨어졌는데 한쪽은 살리는 힘을, 한쪽은 죽이는 힘을 받았다는 게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연이 아니면 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창문을 닫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탑 아래에서 처음 듣는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네 번, 계속.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불빛 몇 개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멀리서 흔들렸다. '뭐야, 이 시간에.' 종소리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빠르고 다급해졌다. 지금까지 두 해를 이 탑에서 지내면서 이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밥때를 알리는 종도 아니었고,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도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종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문을 두드려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열리지도 않을 문이었다. 대신 창틀에 매달려 아래를 살피는데, 저 멀리 신전 쪽에서 붉은 불빛이 치솟는 게 보였다. 불이라도 난 건가. 아니면. 편지를 떠올렸다. 이번 주에 시간 내서 갈게, 라던 그 문장을. 설마 저 소란이 서은이랑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스치자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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