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청람학원, 후원.
양지훈은 찻집에서 그 질문을 던진 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당장 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그저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 날, 나를 찾아오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명함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운소는 그 명함을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명함은 흔한 것이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종이 위에, 술련사 공회의 문양이 은박으로 새겨져 있었을 뿐. 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술련사 공회 4급 군급 술련사, 양지훈.
그가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위험을 의미했다.
전생의 술식을 완전히 재현한 자를 찾아내려는 이들은, 결코 그 하나만이 아닐 것이었다.
이운소는 명함을 뒤집어보았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저 백지. 그 백지 위에 얼마나 많은 질문이 쓰이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경맥 건조가 자연 발생이 아니라는 걸, 그가 알고 있다는 뜻인가.'
이운소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위험이었다. 하지만 그 위험을 눈치챈 자가 하나둘 늘어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명함을 소매 속에 밀어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운소!"
한백이 부르는 소리에, 이운소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와봐. 큰일 났어."
한백의 얼굴이 유독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왔을 그였으나, 지금은 숨까지 거칠었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강도윤 쪽에서 움직이고 있어. 학원 이사회에 접촉해서, 네 대강당 시연을 두고 '금지된 술식 사용'이라며 문제 제기를 했다는군."
이운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금지된 술식이라니."
"12식 신기법이 정식으로 학원 커리큘럼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걸 빌미로, 규정 위반 논란을 만들려는 거야. 근데 사실은..."
한백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핀 뒤였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지. 강도윤 그 자식, 그 시연 이후로 완전히 코가 눌렸잖아. 이사회 쪼는 거는 그냥 명분이고, 실은 널 학원에서 쫓아내려는 거라고."
"쫓아낸다고 해서 될 일인가."
이운소가 낮게 되물었다.
"이미 목격자가 수백이다. 대강당에 있던 학생 전부가 봤어. 그걸 무를 방법은 없다."
"그렇지, 그런데도 강도윤은 그 방법을 찾으려는 거야.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지."
한백이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야 남 일 보듯 즐거운 구경이지만. 넌 어때, 걱정되나?"
"걱정보다는... 성가시다."
이운소가 짧게 답했다.
한백이 픽 웃었다.
"그 태도, 여전하네."
※※※
같은 시각, 귀족파 자제들의 별관.
"강도윤 님, 이사회 반응이 예상보다 냉랭합니다."
귀족파 자제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강도윤은 창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후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서은하 교관이 그 술식을 정식 교육 과정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더군요."
"...서은하."
강도윤이 낮게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귀족파 자제, 문신파의 핵심 인물인 조명환이 입을 열었다.
"강도윤, 이건 잘못된 접근이야. 규정 위반 논란으로는 이길 수 없어. 이운소가 학원장님과 서은하 교관, 그리고 여론까지 등에 업고 있는데."
"그럼 어쩌란 거지?"
강도윤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거지. 직접적인 힘의 대결로 그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
조명환이 미소 지었다.
"단, 그건 네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
"무슨 뜻이지."
"강도윤, 솔직히 말해서 너 자신도 확신이 없잖아. 이운소가 대강당에서 보인 그 실력, 진짜라면 너도 이길 수 없을지 몰라."
강도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분노가 아니라, 처음으로 드러낸 불안이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조명환."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이건 너뿐만이 아니야. 귀족파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모르나?"
조명환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사회 안에서도 이미 말이 돌고 있어. 네가 귀족파의 얼굴로서 이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다음 대표는 다른 이가 될 수도 있다고."
강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내가 안 해도 결국 누군가는 할 거야. 이건 경고다, 강도윤. 확실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지."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른 귀족파 자제들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창밖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처음보다 더 짙게 흔들리고 있었다.
"...확실한 성과라."
그가 되뇌었다.
"이운소를 무너뜨리면 되는 거겠지."
"그게 가장 명확한 방법이다."
조명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그 방법이 규정 위반 논란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귀족파 내부, 겉으로는 결속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면에서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의 중심에, 강도윤이 서 있었다.
※※※
청람학원, 무장파 자제들의 회합 장소.
"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진서율이 팔짱을 낀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백, 이운소, 그리고 무장파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조현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강도윤 쪽에서 규정 위반으로 물고 늘어지려 했지만, 서은하 교관이 정면으로 반박했고, 이사회도 명분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흐지부지될 상황이다."
"그럼 문제는 해결된 거 아닌가?"
조현이 물었다.
키가 크고 무뚝뚝한 인상의 소년, 전형적인 무장파 무인의 아들이었다.
"해결된 건 아니지."
진서율이 고개를 저었다.
"강도윤은 지금 압박을 받고 있어. 이사회 안에서 자기 위치가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런 놈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벼랑 끝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우리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거지."
한백이 정리했다.
"맞아. 이운소, 너를 중심으로 우리가 공식적으로 뭉쳐야 한다."
진서율이 이운소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각자 개인적으로 너를 지지해왔지만, 이제는 확실한 형태를 만들어야 해. 무장파 자제들의 이름으로, 정식으로 너를 지지하겠다."
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한다. 강도윤 쪽 문신파는 이미 흔들리고 있어. 우리가 확실히 세를 규합하면, 학원 전체의 무게중심이 달라질 거다."
진서율이 말을 이었다.
"무장파는 학원 안에서 세가 크지 않아. 문신파나 귀족파에 비하면 늘 뒷전이었지.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름을 알릴 수 있어. 너를 지지한다는 게, 우리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이득이라니,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 있나."
한백이 끼어들었다.
"뭐, 이득도 이득이지만 애초에 우리가 이운소를 좋아하니까 뭉치는 거잖아. 안 그래?"
조현이 짧게 웃었다.
"부정은 안 하겠다."
이운소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십오 년간 홀로 감내해온 삶에서, 이제 확실한 동료들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더 큰 갈등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손끝으로 소매 속의 명함을 매만졌다. 양지훈이 남긴 그 명함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에게까지 위험이 미칠까.'
이운소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전생에서도 그는 늘 혼자였다. 곁에 누군가를 두는 것이 곧 그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그 기억이 지금도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알겠다."
이운소가 대답했다.
"단, 조건이 있다."
"조건?"
"이건 너희의 싸움이 아니라 내 싸움이 될 수도 있다. 강도윤이 노리는 건 나 개인이지, 무장파 전체가 아니다. 너희가 나서면 위험이 커진다."
진서율이 픽 웃었다.
"우리도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 애초에 강도윤 그 잘난 척은 우리도 오래전부터 지긋지긋했으니까."
한백이 씩 웃으며 이운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뭐, 강도윤이 진짜 무서운 놈이면 애초에 우리가 뭉칠 이유도 없었겠지. 이제 와서 물러설 생각 없다."
조현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다. 뒤로 물러설 거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결정됐다. 오늘부터 우리는 정식으로 이운소를 중심으로 뭉친다."
진서율이 손을 내밀었다.
이운소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밀어 잡았다.
손을 맞잡는 그 짧은 순간, 이운소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생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
같은 날 밤, 술련사 공회 해동국 분소.
접객원 정유라는 책상 앞에 앉아, 최근 접수된 보고서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청람학원 대강당에서 벌어진 12식 신기법 시연에 관한 목격자 진술서였다.
"...만천화우, 파산붕."
그녀가 낮게 문양의 이름을 되뇌었다.
정유라는 술련사 공회에서 삼사 년째 근무하며, 화선대륙 각지에서 올라오는 각종 술식 관련 보고서를 관리해왔다.
그 과정에서 12식 신기법의 원전, 그리고 파멸검제 고비양에 관한 기록도 여러 번 접해본 그녀였다.
"이 정도 완성도로 재현이 가능한 사람이... 학원생이라고?"
그녀는 보고서를 다시 넘겨보았다. 목격자들의 진술은 하나같이 구체적이었다. 검기의 형태, 술식의 순서, 파괴력의 범위까지. 어설픈 흉내가 아니라, 완벽한 재현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운소.
열다섯, 경맥 건조로 판정받은 폐인 취급 학생.
하지만 정유라의 직감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경맥 건조라는 저주는... 애초에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인위적으로 봉인된 경우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정유라는 과거 공회에서 다뤘던 유사한 사례들을 떠올렸다. 경맥이 봉인된 이들 중, 그 봉인의 원인이 자연적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지나치게 강대한 힘을 지녔거나, 혹은 감춰야 할 무언가를 지닌 이들이었다.
'봉인된 경맥. 그리고 파멸검제의 술식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지식.'
그 두 가지가 한 사람에게 겹쳐진다는 건,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다.
그저 조각난 정보와 직감뿐.
"...양지훈 님도 이미 이 아이를 접촉하셨다고 했지."
정유라는 서랍에서 오래된 문서 하나를 꺼냈다. 파멸검제 고비양에 관한 공회의 비밀 기록이었다. 그 안에는 그의 실전된 술식들의 명칭과, 그 술식들을 온전히 계승한 자가 나타날 경우 보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조항을 다시 읽었다. 손끝이 서늘해졌다.
'이 조항대로라면, 나는 지금 즉시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유라는 보고서를 서류함에 넣지 않고, 자신의 개인 서랍에 따로 보관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그녀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오랜 세월 보고서를 다뤄온 직감이, 이 사안을 섣부르게 상부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유난히 짙은 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조용한 관찰이, 곧 화선대륙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진실의 첫 단서가 되리라는 것을.
정유라는 서랍을 닫았다. 자물쇠를 채우는 그 작은 소리가, 어쩐지 무겁게 방 안에 퍼졌다.
'양지훈 님이 움직였다면, 다른 이들도 곧 움직일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창밖의 달을 향했다.
'이운소... 라고 했나.'
그 이름을 되뇌는 그녀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