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청람학원, 교무실.
서은하는 자신의 책상 앞에 이운소를 세워두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껴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붓과 벼루, 그리고 미완성인 술식 문양이 그려진 종이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대강당 사건이 있은 지 이틀이 지났지만, 여전히 학원 전체가 그 이야기로 가득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이운소를 향해 시선을 던졌고, 몇몇은 대놓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그 시선들 속에는 예전과는 다른 색이 섞여 있었다.
경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짙은 것은 당혹감이었다.
"...설명해봐라."
서은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평소라면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경맥이 건조한 네가, 어떻게 그런 고차원의 술식을 발현할 수 있었지?"
이운소는 잠시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 파멸검제 고비양, 그 모든 것을 이 자리에서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십오 년 전, 그가 이 세계에 다시 눈을 뜬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실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그저... 갑자기 알게 됐습니다."
"그런 대답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
서은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존경심.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등을 돌린 채, 잠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에서 훈련 중인 학생들의 함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12식 신기법. 파멸검제 고비양의 절기라 알려진 그것을, 경맥이 건조된 학생이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나?"
그녀가 다시 돌아섰다.
"만약 네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낫다. 학원 측에서 따로 조사를 시작하면, 그때는 나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이운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
학원의 조사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술식 감별사가 동원되고, 심지어 정신 계열 술식으로 기억을 뒤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전생의 기억이 파헤쳐진다면,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선생님."
이운소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서은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지?"
"요즘 술식 하나를 두고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서은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무슨 소리냐."
그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3주 전부터 연구 중이신 고위 봉인술식. 4상경계 승급 시험 준비용으로 짐작됩니다만, 세 번째 층위 문양에서 계속 막히고 있지 않으십니까."
서은하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녀 혼자만 알고 있는 문제였다.
승급 시험을 앞두고 몇 주째 붙잡고 있던 난제.
심지어 동료 교사들에게도 티 내지 않으려 애써왔건만.
"...어떻게 그걸 알지."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계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짧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이운소는 서은하의 책상 위 종이를 끌어와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
붓끝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스슥, 스스슥.'
몇 개의 선이 겹치고, 원이 그려지고, 그 안에 작은 문자들이 촘촘히 채워졌다.
서은하는 그 손놀림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평범한 학생의 손이 아니었다.
수십 년 경력의 술사가 봐도 감탄할 만한, 절제되고 확신에 찬 필체였다.
"세 번째 층위에서 막힌 건, 술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운의 유입 순서 때문입니다. 정통 36수법에서는 안에서 밖으로 기운을 흘리지만, 이 봉인술식은 반대로 구성돼야 합니다."
이운소가 문양의 한 부분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 지점에서 역류가 일어나야 봉인력이 완성됩니다. 지금 구성대로라면,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세 번째 층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서은하는 그 문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몇 초, 몇 십 초.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거다."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이거였어."
서은하는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몇 주간 풀리지 않던 난제가, 단 몇 마디로 해결된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술사로서의 자존심과, 눈앞의 사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이 나이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이운소가 그려놓은 역류 구조는 단순한 짐작으로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년을 봉인술식만 파고든 자의 통찰이었다.
"이운소."
그녀가 그를 다시 불렀다.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네."
"내가 사과해야겠다."
"네?"
"너를 폐인이라 여기고, 특수반으로 전출시키려 했던 것. 그건 내 실수였다."
서은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교사로서, 그리고 학원의 어른으로서 하기 쉽지 않은 말이었다.
이운소는 잠시 침묵했다.
십오 년간 받아온 조롱과 무시가 겹겹이 쌓인 마음이었다.
한 번의 사과로 사라질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진심을 무시할 이유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짧게 대답했다.
"경맥 건조에 대해서는, 앞으로 제가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
서은하가 말했다.
"학원에서 보유한 자료, 그리고 내가 아는 4상경계 술사들의 인맥까지 모두 동원하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다."
이운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경맥 회복.'
그것은 지금껏 그가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목표였다.
전생의 힘을 되찾는 것, 그리고 이 저주받은 몸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
둘은 결국 하나의 길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이운소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서은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 위의 문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봐라. 이 문제는 내가 더 다듬어볼 테니."
※※※
교무실을 나선 이운소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야, 이운소!"
한백이었다.
무장파 자제, 다부진 체격에 시원스러운 말투를 가진 소년.
그가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왔다.
"너 대체 뭐냐? 그날 이후로 학원 전체가 난리도 아니야. 다들 네 얘기밖에 안 해."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닌 게 아니지! 12식 신기법이라니, 그거 완전 전설 아니냐. 파멸검제만 쓸 수 있다는 그거!"
한백이 흥분한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우리 집안 어르신들도 그 이름만 들으면 자세를 고쳐 앉는다니까. 그런데 그걸 네가, 무등급 열등생 출신이... 야, 이거 진짜 대단한 거야."
이운소는 흠칫했다.
한백은 이미 그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우리 집 서고에 관련 서적이 있었거든. 어릴 때 심심해서 다 읽어봤지. 근데 그게 왜, 뭐 이상해?"
한백이 눈을 깜빡였다.
순진한 표정.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이운소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적어도 이 소년은 위험한 상대가 아니었다.
"흐음, 뭐 좋아. 아무튼 나는 네 편이다, 이운소. 강도윤 그 자식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으니, 이제 제대로 놀아보자고."
한백이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손힘이 제법 무거워서, 이운소는 잠깐 발끝이 흔들렸다.
"그리고 말이야, 너 혹시 나중에 나랑 대련 한번 해줄 수 있어?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 초식, 실제로 보고 싶어서."
"...생각해보겠다."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한백, 너 벌써 낚였구나."
진서율이었다.
공주, 무장파 파벌의 핵심 인물.
곱게 손질된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
그녀가 다가오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자연스레 길을 비켰다.
"낚이긴 뭘 낚여. 그냥 친하게 지내려는 거지."
한백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됐고."
진서율이 이운소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이운소를 위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평가하는 듯한, 그러나 적의는 없는 시선이었다.
"네가 그 이운소구나. 강도윤 얼굴 굳는 거, 내 평생 그렇게 재밌게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운소가 반문했다.
"공주라고 부를 필요 없다. 편하게 불러도 좋다."
진서율이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우아했다.
"그리고 이건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강도윤을 싫어한다. 그놈의 그 잘난 척, 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짓밟는 태도. 정말 지긋지긋해."
그녀의 눈매가 순간 서늘해졌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사람으로 안 봐. 그게 얼마나 꼴사나운지, 넌 모를 거다."
"..."
이운소는 그 말투에서 진심 어린 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파벌 다툼 이상의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듯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 좋은 관계로 지내보자고. 어때?"
한백이 옆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셋이 뭉치면 강도윤 놈도 함부로 못 나올걸."
이운소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십오 년간 혼자였던 그에게, 이런 관계는 낯설었다.
전생에서도 그는 늘 정점에 홀로 서 있었을 뿐, 이런 식의 가벼운 관계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백이 환하게 웃었고, 진서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수련장에 가봐야 해서."
진서율이 손을 흔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한백도 뒤따라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운소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텅 빈 복도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
다음 날 정오, 학원 뒤편 훈련장.
인적이 드문 시간이었다.
훈련장 주변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이운소는 홀로 남아 경맥의 흐름을 점검하고 있었다.
건조된 경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부를 살피면, 마치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진 경맥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술련 능력은 확실히 되살아났다.
무도와 술련은 원래 다른 계통의 힘이었으나, 파멸검제 고비양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극한까지 다룬 자였다.
'경맥이 열려야 무도도 완전해진다.'
이운소는 조용히 손끝을 들어 허공에 작은 문양을 그려보았다.
술식의 기운이 손끝에서 미약하게 피어올랐다가, 곧 흩어졌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생각에 잠긴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이운소가 낮게 물었다.
동시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 시간에 훈련장을 찾을 사람은 흔치 않았다.
대답 대신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술식판 근처, 그늘에 반쪽 잠긴 채 서 있는 남학생.
5일 전 사급 술련사로 갓 승격한 자, 강태호였다.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창백했고,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소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너, 이운소 맞지."
강태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평소 강태호는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은 낯설었다.
이운소는 그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중독 증상.
무언가 위험한 것을 잘못 다룬 흔적이었다.
피부색이 창백을 넘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운소가 조심스레 거리를 좁혔다.
강태호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의 우수 손목, 소맷자락 안쪽에서 검붉은 핏줄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핏줄기는 일반적인 상처와는 다른, 기이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부탁이... 있다."
그 말과 함께, 강태호의 몸이 갑자기 크게 휘청거렸다.
'철퍽!'
무릎이 땅에 닿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