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대문 앞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멈춰 선 인물은 왕국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는 대장군이었다.
투두둑, 투둑.
말발굽이 흙바닥을 두드리던 소리가 완전히 멎자, 마당을 채우고 있던 소란스러움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종군 시절 도현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자, 전장에서 헤어진 뒤로는 소식조차 뜸했던 그 남자가 갑작스레 이 자리에 나타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당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순간 그에게로 쏠렸다.
'대장군님이…… 여기에 어떻게……'
도현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병사의 손아귀 힘이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앞의 광경이 현실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는데, 문득 오래전 전장의 흙탕물 속에서 화살이 자신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 적군의 매복에 걸려 부대 전체가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대장군은 자신의 검을 던져 도현을 노리던 화살을 쳐냈고, 그 뒤로도 후퇴하는 부대의 맨 끝에서 도현의 등을 밀어내며 함께 살아남았던 것이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 손길과 지금 이 눈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구나.'
"이게 무슨 소란인가."
낮고 굵은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지르자 병사들의 손길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졌고, 도현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도 자연히 풀려나갔다.
대장군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오며 한도윤을 똑바로 응시했는데, 그 눈빛에는 오랜 전장에서 다져진 위압감이 서려 있어 한도윤조차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한도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그 걸음걸이에는 이미 이전과 같은 여유가 실려 있지 않았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것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백작가 후계자께서 직접 병력을 동원해 자작가를 급습하다니, 그럴 만한 근거는 충분한가."
대장군의 물음에 한도윤은 애써 여유를 되찾으려는 듯 서류를 내밀었지만, 그것을 훑어본 대장군의 표정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서류를 넘기는 대장군의 손끝이 종잇장 위에서 잠시 멈추었고, 그 정지된 순간이 마당 전체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이 혐의들, 증거라 할 만한 것이 목격자 진술 몇 줄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 진술을 한 자들이 전부 서가상회와 거래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니."
그 한마디에 마당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한도윤의 표정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도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그건……"
한도윤이 입을 열었지만, 그 뒤를 이을 말을 찾지 못한 채 목소리가 흐려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동요가 번지기 시작했다.
"강 자작은 왕국 종군 시절 내가 직접 곁에 두고 지켜본 자다. 이 정도 조작으로 그의 명예를 짓밟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왕실 재판정에 세워야 할 사안이지."
대장군의 단호한 선언에 병사들은 그대로 발걸음을 멈춘 채 서로 눈치를 살폈고, 한도윤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얼마나 길게 이어졌는지, 마당에 서 있던 이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대장군과 한도윤 사이의 팽팽한 기류를 지켜보았는데, 결국 그 긴장을 먼저 깨뜨린 것은 한도윤 쪽이었다.
"오늘 일은…… 다시 논의할 여지가 있을 것 같군요."
한도윤이 애써 짜낸 그 한마디에는 이미 패배를 인정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그럼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려는 자존심만이 목소리 끝자락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결국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조용히 물러났고, 한도윤 역시 굳은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며 마당을 떠났는데, 그가 마차에 오르기 직전 도현을 향해 던진 마지막 눈빛에는 분명한 앙심이 서려 있었다.
덜컹, 마차 바퀴가 흙길을 밀어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마당에 감돌던 살벌한 기운도 서서히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떠난 뒤, 대장군은 도현을 향해 돌아서며 품 안에서 낡은 서류 뭉치를 꺼내 그의 손에 건넸다.
서류 뭉치를 건네는 대장군의 손끝이 도현의 손등에 잠시 닿았을 때, 도현은 그 손이 예전과 다름없이 굵고 단단하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건 서가상회가 지난 몇 년간 벌인 불법 거래와 세금 포탈에 관한 증거들이다. 자네가 신뢰할 만한 이에게 조사를 맡겨보게."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들었고, 그 무게가 단순한 종이 뭉치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증거를 모으셨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서가상회를 주시하고 계셨던 걸까.'
"이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도현의 물음에 대장군은 짧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 것처럼, 이번에도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다만 이번 싸움은 칼이 아니라 돈과 정보로 하는 싸움이 될 거야."
그 말을 남긴 채 대장군은 다시 말에 올라 왔던 길로 돌아갔고, 도현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류를 품에 꽉 끌어안고 서 있었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도현의 시선은 대문 밖 흙길에서 떠나지 못했는데, 그 시선 끝에는 방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다시는…… 순진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되뇌는 그 다짐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결의였는데,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사과나 명예 회복이 아니라, 서지아와 한도윤, 그리고 서정호가 딛고 서 있는 모든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짓밟기 위해 썼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반드시 되돌려줄 것이다.'
그 다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도현은 품속의 서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서재로 돌아온 도현이 서류를 책상 위에 펼쳐놓자, 하윤과 소은채, 하진우가 그 주위로 모여들었고, 마당에서 다시 날아든 홍염이 창밖에서 붉은 눈동자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윤은 서류 뭉치를 한 장씩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는 등 표정의 변화가 뚜렷했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소은채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이 정도 증거라면……"
하윤이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며 눈을 빛냈고, 그녀의 입가에 오랜만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진우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고, 그 소리에 소은채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서류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가상회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계획이 하나 있어요."
그녀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저택 대문 밖에서 다시 낯익은 마차 소리가 들려왔고, 창밖을 내다본 소은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덜그럭, 덜그럭.
바퀴가 자갈길 위를 구르는 소리가 서재 안까지 스며들었고, 그 소리에 하윤도 서류를 내려놓으며 창가로 다가섰다.
"저거…… 서지아잖아."
그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서재 안의 모든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고, 마차에서 내린 서지아가 홀로, 그것도 아무런 경계 없이 저택 대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위 하나 없이, 그저 자신의 발걸음만을 믿는 듯 흔들림 없이 다가오는 서지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현의 가슴 한켠이 서서히 서늘해지기 시작했는데, 저 여자가 무슨 속셈으로 이 시각에, 이런 모습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을 부추겼다.
'설마…… 벌써 알고 찾아온 건가.'
창밖의 서지아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대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고, 그 고요한 걸음걸이가 오히려 서재 안에 있던 모두의 숨을 더욱 조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