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거기서 손 내려요!" 근위병 하나가 소리쳤다.
'이거 뭔가 잘못 걸린 느낌인데.'
나는 손을 든 채로 최대한 수상하지 않게 웃어 보였다.
효과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근위병들의 창끝이 조금 더 나를 향해 좁혀졌다.
'하긴,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 뿅 하고 나타난 놈이 웃고 있으면 더 무섭겠지.'
게다가 옆에는 시커먼 안개 짐승이 얌전히 앉아 꼬리 같은 걸 흔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조합은 아니었다.
"신원을 밝히시오." 다른 근위병이 창을 겨누며 말했다.
순간 고민이 됐다.
내가 서진우라고 하면 믿을까.
아니면 그냥 정신병자로 끌려갈까.
'그것도 아니면 저 석상이랑 닮았다고 몽둥이부터 날아올 수도 있겠고.'
아까 광장 한가운데서 봤던, 나를 쏙 빼닮은 그 석상이 자꾸 눈에 밟혔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설명해도 안 믿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 광장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잠깐만!" 누군가 크게 외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였다.
갑옷을 입은 채로, 숨이 턱에 차오르는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광장 바닥을 울릴 정도였다.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태현이다.'
10년이 지났으니 얼굴이 많이 변해 있었다.
턱수염이 자랐고,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다.
예전보다 어깨도 훨씬 두꺼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그대로였다.
저 눈빛으로 마물 앞에서도 절대 안 물러서던 놈이었다.
"진우야?" 태현이 나를 향해 걸어오며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현아." 나는 겨우 그 이름만 불렀다.
목이 이상하게 막혀서 그 이상은 나오지도 않았다.
태현이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나를 한참 훑어봤다.
지팡이, 얼굴,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검은 안개 짐승까지.
'저 짐승 때문에 신뢰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긴 한데.'
지금 저걸 설명할 정신은 없었다.
"진짜... 진우 맞아?" 그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 나야. 서진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태현이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깨에 박히는 갑옷 모서리가 아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구나!" 그가 목이 메어 소리쳤다.
근위병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용사 강태현이 저렇게 통곡하다시피 끌어안는 상대라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창을 슬그머니 내렸고, 누군가는 아예 뒷걸음질을 쳤다.
"태현아, 나 숨 막혀." 나는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10년이야, 진우야. 10년." 그가 목이 잠긴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좀 다르게 느껴지긴 했지만, 저쪽에선 진짜 10년을 버틴 거였구나.'
문득 태현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없던 상처였다.
그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걸 겪었을지, 짧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아, 뭔데 그렇게..."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박도윤이었다.
그도 태현처럼 나이가 더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큰 체격은 여전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도윤이 나를 보는 순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철컹, 갑옷 무릎 보호대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우..." 그가 신음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들썩이며.
'와, 도윤이가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네.'
전사로서 늘 표정이 굳어있던 그였다.
협곡에서 마물들과 싸울 때도,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소리 한번 안 지르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무너지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만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도윤이 계속 중얼거렸다.
"뭐가 미안해." 나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너 혼자 두고 도망친 거..." 그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건 도망친 게 아니라 내가 등 밀어서 보낸 거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려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참 동안 광장 한가운데서 세 사람이 그렇게 붙어 있었다.
근위병들은 어느새 거리를 두고 조용히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옆 사람에게 뭐라 소곤거리기도 했다.
'저기 저 사람, 아까 그 석상이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
어렴풋이 그런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진우야, 저 석상..." 태현이 눈물을 닦으며 석상을 가리켰다.
"봤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우리가 그렇게 전했어. 네가 우릴 살리고... 전사했다고." 태현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야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망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두 사람이 살아 돌아갔고, 가족을 꾸렸다는 게 다행이었다.
석상으로 세워진 것치고는 얼굴이 너무 근엄하게 나왔다는 게 좀 불만이긴 했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태현아, 나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세상이 다 바뀐 것 같아." 나는 힘없이 웃었다.
"천천히 다 알려줄게." 도윤이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일단 배고프지 않아? 얼굴이 반쪽이야." 그가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밥이란 걸 언제 먹었더라.'
나는 대답 대신 배를 슬쩍 만졌다.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것도 아주 크게.
태현과 도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진우답네." 태현이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웃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배는 어떻게 그렇게 정직해." 도윤도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죽다 살아난 놈한테 위엄 없다고 놀리는 것 좀 봐.'
그래도 그 웃음소리가 반가워서, 나도 그냥 같이 웃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광장을 벗어나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태현이 그간의 전황을 짧게 정리해줬다.
마신 잔당의 대부분은 소멸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것.
왕실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여전히 국경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도 새로운 균열이 종종 열린다는 것.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물들이랑 싸우고 있다니.'
생각보다 세상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저 두 사람이 살아서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됐다.
"그리고 왕실에서 너 이야기 들으면 아마 난리 날 거야." 도윤이 걸으며 말했다.
"난리라니?" 나는 되물었다.
"너 지금 이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야, 진우야." 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명한 게 아니라 이미 죽은 걸로 유명한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정해봤자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여관에 도착해서 방을 잡았다.
낡았지만 나름 깔끔한 방이었다.
침대 하나, 낡은 탁자 하나, 그리고 창문 하나.
'이 정도면 던전 안에서 자던 거보다 백배는 낫지.'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태현과 도윤이 옆에 앉아 내가 밥을 먹는 걸 지켜봤다.
마치 어린애를 챙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빵 한 조각, 스튜 한 그릇이 나왔을 뿐인데 두 사람 다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체해." 도윤이 걱정스레 말했다.
'전투 중에 마기 흡수로 끼니를 때웠던 사람한테 체할 걱정을 하다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 걱정이 고맙기도 했다.
스튜를 한 숟갈 떠먹는데, 태현이 또 눈물을 훔쳤다.
"뭐야, 밥 먹는 거 보고 왜 또 울어."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라, 그냥... 네가 밥 먹는 걸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태현이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 감성 하나는 여전하네.'
나는 그냥 못 들은 척 스튜를 계속 떠먹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여관 창밖으로 왕궁 방향에서 마차 몇 대가 급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횃불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여관 창문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게 뭔데 저렇게 소란스러워?" 나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태현과 도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 심각한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마... 네 소식이 벌써 왕궁에 들어간 것 같아." 태현이 낮게 말했다.
"왕궁이 왜?" 나는 되물었다.
'설마 죽은 놈이 돌아왔다고 축하 파티라도 열려는 건가.'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드레인 마법 말이야, 진우야." 도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힘, 왕실이 이미 관심 두고 있었어. 균열이 닫힌 방식 자체가 이상하다고, 몇 년 전부터 조사팀이 파견됐다는 얘기가 있었거든." 그가 심각하게 덧붙였다.
'조사팀이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스튜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균열, 네가 닫은 거였잖아." 태현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힘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것도 다들 알아."
마차 행렬이 점점 여관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이제는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마차 문양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저거, 설마 왕실 문양 아니야?'
숟가락을 든 손이 그대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