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협곡 저편에서 뭔가가 울부짖고 있었다.
낮게 시작해서 점점 높아지는, 듣는 것만으로 척추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짐승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물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애매했다.
그냥...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 억지로 존재하려고 발버둥치는 소리, 라고 하면 제일 비슷할까.
마신왕의 잔존 병력,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상대해야 할 무언가가 저 안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협곡 벽에는 검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틈새마다 짙은 안개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낮게 깔려서 우리 발목을 핥듯이 지나갔다.
'꼭 습식 사우나 같네.'
아니, 지금 이 상황에 그 비유가 왜 떠오르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서진우다.
용사 파티의 마도사, 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파티 내 서열은 늘 3위였다.
1위는 강태현, 검 한번 휘두르면 산이 갈라지는 용사.
2위는 박도윤, 방패 하나로 성벽 노릇을 하는 전사.
3위는 나.
마법은 잘 쓰지만 몸이 약하고, 결정적으로 전투보다 도서관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부류였다.
비유하자면 전학생 세 명이 왔는데 둘은 전국체전 나가고 하나는 도서부 부장인 느낌.
아니 그 도서부 부장이 왜 마왕 토벌대에 껴 있는 건지는 나도 종종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야영지에서 금서 한 권 훔쳐봤었지.'
아니, 지금 이 상황에 그 생각이 왜 나는 건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마법서든 금서든, 봉인된 문헌이든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면 밤새 읽는 부류였다.
전날 밤에도 마신왕의 신전에서 노획한 낡은 책 한 권을 몰래 펼쳤다가, 태현이 순찰 돌다가 텐트 틈으로 불빛 새는 걸 보고 "너 또 그거냐" 하며 혀를 찼었다.
동료들은 그런 나를 두고 "저 자식은 전쟁 중에도 책 챙긴다"며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다들 웃었다.
심지어 도윤은 내 짐 속에서 발견한 삼류 연애소설을 파티 전체 앞에서 낭독한 적도 있었다.
그날 나는 사흘 동안 도윤과 말을 안 섞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가한 시절이었다.
"진우!" 강태현이 소리쳤다.
"태현아, 여기 위험해!" 나는 마지막 방벽 마법을 펼치며 외쳤다.
협곡 입구가 무너지고 있었다.
돌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볼링공이 레인을 부수는 것처럼 요란했다.
마신왕은 죽었지만, 그놈이 남긴 마기의 잔재가 균열을 통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서, 아직 살아있는 잔존 병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감지: 협곡 붕괴율 41%]
'이제 통계까지 알려주네. 아주 친절하시다.'
"도윤이 다리가 부러졌어! 후퇴해야 해!" 태현이 다시 소리쳤다.
'후퇴라니, 이 좁은 협곡에서 어떻게.'
뒤는 절벽, 앞은 마신 군단.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마치 시험지에 답이 두 개뿐인데 둘 다 오답인 상황이랄까.
그것도 주관식으로.
[경고: 방벽 마력 78% 소모]
'이 시스템 메시지는 진짜 매번 눈치 없이 뜨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남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인생을 돌아본다는데, 나는 시스템 메시지의 타이밍이 나쁘다는 것부터 신경 쓰고 있었다.
이러니 진짜 옛날 개그 만화 조연이 된 느낌이었다.
도윤이 신음을 흘리며 바위에 기대앉았다.
그의 다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괜찮아, 나 놔두고 가." 도윤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그 웃음을 믿지 않았다.
"이대로면 다 죽어." 태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떨린다는 건, 그가 정말로 겁먹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손을 처음 봤다.
용사가 겁먹는 모습이라니, 이건 무슨 시나리오 작가가 만든 반전이지.
"그럼 누군가는 남아야지."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안개의 스산한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다시 울려오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
그 정적 안에서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태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셋 다 죽는 것보단 하나가 낫잖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섭다. 당연히 무섭지.'
무섭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온몸의 감각이 다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나왔다.
훈련된 배우처럼, 아니면 그냥 정신이 이미 반쯔 나가버린 것처럼.
마신 군단의 선봉이 협곡 안쪽에서 형체를 드러냈다.
검은 안개 같은 몸체, 붉은 눈,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살기.
멀리서 봤을 땐 사람 형체였는데, 가까이 올수록 그 윤곽이 뭉개졌다.
꼭 오래된 필름이 늘어져서 화면이 뒤틀린 것처럼.
[감지: 마기 농도 위험 수준]
'경고 좀 더 일찍 해주면 안 되나.'
이미 코앞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위험하다고 알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시스템.
"안 돼, 진우 너 혼자 두고는 못 가!" 태현이 검을 다시 쥐며 소리쳤다.
"태현아, 애 있잖아." 나는 낮게 말했다.
태현이 멈췄다.
그의 아들 얼굴이 스쳤을 것이다.
왕도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꼬맹이는 아빠 검을 흉내 내며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빠처럼 될 거야!" 하고 소리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 아이가 아빠 없이 자라는 모습을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왕도에 가족을 두고 온 처지였다.
도윤은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서 아이 이름을 짓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 이름 짓는 자리에 나는 없어도 됐다.
나는 없었다.
독신, 그리고 집이라고 할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책으로 가득 찬 서재 하나가 내 전 재산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결국 남을 사람은 나여야 했다.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누가 더 많이 잃을지, 누가 덜 잃을지, 그 단순한 산수 앞에서 나는 늘 가장 가벼운 쪽이었다.
"태현아." 나는 그를 불렀다.
"...뭐." 그가 목이 잠긴 소리로 대답했다.
"내 서재에 있는 책들, 아무도 손 대지 마." 나는 웃으며 말했다.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유언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남길 말이 그 정도밖에 없냐고 물으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가장 진심으로 나온 말이 그거였다.
그때였다.
협곡 안쪽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렸다.
마신왕이 남긴 잔재, 마기의 핵이 균열을 뚫고 나오려는 조짐이었다.
땅이 울렸다.
발밑의 돌들이 저절로 튀어 오를 정도였다.
[경고: 협곡 붕괴율 67%]
'숫자 올라가는 속도가 왜 이렇게 빨라.'
"먼저 가!" 나는 마지막 마력을 끌어올려 방벽을 더 넓게 펼쳤다.
손끝에서부터 마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뜨거운 물을 손에 붓는 것 같은, 그런데 아프지는 않은 이상한 감각.
방벽이 협곡 전체를 뒤덮듯 펼쳐졌다.
도윤을 업은 태현이 뒷걸음질쳤다.
"진우, 반드시 돌아와!" 태현이 소리쳤다.
"그래, 그래." 나는 대충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돌아올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결과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숫자를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가슴 안쪽에서 뜨겁게 끓어올랐다.
[???] 미확인 스킬 발현 조건 충족.
'뭐야 이건.'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그동안 수백 개의 시스템 메시지를 봐왔지만 물음표 세 개짜리는 처음이었다.
이건 무슨 게임 내 숨겨진 보스 이벤트냐.
동료들의 뒷모습이 협곡 저편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마신 군단의 선봉 앞에 홀로 섰다.
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숨이 막혔다.
공기 자체가 무거운 액체로 바뀐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는 게 아니라 삼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쪽에서, 뭔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금서를 처음 펼쳤을 때의 그 감각처럼.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종이 냄새만으로 뭔가 대단한 게 담겨 있다는 걸 직감하는, 그런 이상한 확신.
'설마.'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절대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그 확신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마기가 갑자기 한 방향으로, 마치 자석에 끌리듯 나를 향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