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 마도사, 동상이 되다

4화

협곡 밖으로 나온 순간, 처음 느낀 건 냄새였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어딘가 낯선 냄새. 내가 알던 협곡 근처는 늘 마기와 피 냄새가 진동했는데,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산의 냄새였다. '뭐야, 여기 이렇게 깨끗했었나.'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협곡 입구 근처 나무들이 훨씬 커져 있었다. 예전엔 허리춤 정도였던 묘목이 지금은 내 키를 훌쩍 넘고 있었다. '저거 심을 때 내가 옆에서 흙 밟아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맞다면, 그 나무는 원래 손가락만 한 새싹이었다. 지금은 두 팔로 안아도 손끝이 안 닿을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검은 안개 짐승이 내 발치에서 킁킁거리며 낯선 풍경을 관찰했다. 평소 같으면 마물 냄새라도 찾아 신나게 뛰어다녔을 녀석인데, 지금은 얌전히 코만 벌렁거렸다. '너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아는구나.' 나는 짐승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협곡 입구를 표시하던 낡은 팻말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훨씬 튼튼해 보이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표면이 이끼로 반쯤 덮여 있었다. '저건 또 언제 세운 거야.' 이끼가 저 정도로 자라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린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있었던 건가.'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애써 불안을 눌러 넣고 걸음을 옮겼다. 왕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쳤다. 마을 초입에 있던 오래된 우물이 기억났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새 우물이 있었다. 디자인도 완전히 달랐다. 전에는 그냥 돌을 대충 쌓아 올린 투박한 우물이었는데, 지금은 지붕도 달려 있고 도르래까지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우물 인테리어 리모델링 한 거야, 뭐야.' 마을 어귀에 있던 나무 담장도 새로 갈린 것 같았다. 색이 훨씬 밝고, 못 자국도 새것이었다. 지붕 이엉도 갈아 얹은 지 얼마 안 된 듯 노란 빛깔이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마을 하나도 이렇게 바뀌어 있으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불길한 계산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그 계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농부를 붙잡았다. "저기요." 나는 지나가는 농부를 붙잡고 물었다. "지금이 몇 년이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농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이 인간 뭐지' 하는 표정 그대로였다. "...무슨 소리요." 그가 뒷걸음질치며 대답했다. '아, 이건 좀 이상한 질문이었나.' 당연했다. 길 가다 처음 보는 사람이 "지금 몇 년이죠?"라고 물으면, 나라도 도망갔을 것이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 그게, 여행을 오래 다녀서요." 나는 웃으며 둘러댔다. "산속에 좀 오래 있다 보니까, 날짜 감각이 없어져서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덧붙였다. 농부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훑었다. 초라한 행색, 여기저기 해진 옷, 그리고 발치에 붙어 있는 시커먼 짐승까지. 누가 봐도 정상적인 여행자는 아니었다. "산에 사는 사람이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대충 그런 셈이지.' "네, 비슷해요." 나는 얼버무렸다. 농부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듯, 짧게 대답해 주었다. "지금은 왕력 723년이오." 그가 짧게 대답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마신왕과의 결전이 있던 게 왕력 713년이었다. 그럼 지금은. '10년.' 숨이 턱 막혔다. 협곡 안에서 나는 시간 감각을 잃었고, 그동안 무려 10년이 흘러 있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람들이 늙고,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이 흘러가는 그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마물을 흡수하는 몇 번의 순간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내 체감으로는 길어야 몇 달인데.' 허탈했다. 아니, 허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했다. 농부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슬쩍 자리를 피했지만,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럼 태현이랑 도윤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인과 자식이 있던 그들이라면, 10년 사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 꼬맹이가 벌써 그렇게 컸다고?' 믹서기처럼 머릿속이 뒤섞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왕도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갖 상상이 따라붙었다. '다들 나 죽은 줄 알고 있었으면 어떡하지.' 그 상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왕도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 왕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한 광경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입구 광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지팡이를 든 마도사의 형상. 크기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웬만한 이층집보다 훨씬 컸다. '저거 뭐야, 광장 랜드마크인가.' 가까이 다가가서 봤다. 석상의 얼굴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했다. 그건 나였다. 정확히는, 지팡이를 든 채 어딘가를 노려보는 포즈의 나였다. 조각가가 실물보다 조금 더 근엄하게 다듬어놓은 게 눈에 보였다. '실제로 저런 표정 지은 적 없는데.' 석상 아래에 새겨진 문구가 보였다. 『균열의 협곡의 영웅, 서진우를 기리며. 동료를 지키기 위해 홀로 마신군단과 맞서다 전사하다.』 '전사...했다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글자를 다시 읽었다. 서진우. 동료를 지키기 위해. 전사하다. '세 번을 읽어도 똑같은 소리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석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거나 꽃을 놓고 있었다. 누군가는 술 한 병을 놓고 갔고, 누군가는 그냥 잠시 멈춰 서서 묵념하듯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석상을 가리키며 뭔가를 재잘거렸다. "엄마, 저 영웅님 이야기 또 해줘!" 한 아이가 신나게 말했다. "그래, 균열의 협곡에서 마신왕의 군단을 다 물리치고 돌아가신 분이야." 아이의 엄마가 자상하게 대답했다. "그분이 안 계셨으면 우리도 여기 없었을 거야." 그녀가 덧붙였다. '다 물리치고 돌아가셨다니, 나 지금 눈앞에 서 있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협곡 안에서 마기를 흡수하며 버티던 그 시간이, 이 세상에서는 완결된 전설이 되어 있었다. 노래도 있고, 그림도 있고, 심지어 아이들 동화책에도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근처 상점 진열대에는 내 얼굴을 그려 넣은 목판화까지 걸려 있었다. '저건 좀... 실물보다 잘 나온 것 같은데.' 이럴 상황에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내가 어이없었다. 검은 안개 짐승이 내 다리에 몸을 붙였다. 마치 이 낯선 상황이 불안하다는 듯이. 녀석도 사람들 시선을 피해 몸을 낮췄다. '나만 그대로고, 세상은 다 흘러가 버렸구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웃을수록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이제 없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도 10년치 삶을 더 쌓았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마물이나 씹어 삼키고 있었는데.' 비교가 너무 잔인했다. 석상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병사 몇 명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뭐 하는 거요." 근위병이 창을 겨누며 물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행색이 초라한 낯선 남자가 영웅의 석상 앞에 오래 서 있는 게 이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발치에는 시커먼 짐승까지 붙어 있으니, 누가 봐도 정상적인 참배객으로는 안 보였을 터였다. '그야 나도 좀 그렇지, 이 상황.'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다. 내가 서진우라고 말하면 믿어줄까. 아니면 그냥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근위병들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를 세어보니 넷. 전부 정규 갑주를 입고 있었고, 왕도 근위대 특유의 문양이 어깨에 새겨져 있었다. '예전보다 갑주 디자인도 좀 바뀌었네.' 이런 순간에도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확실히 정신이 어딘가 살짝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창끝이 반짝였다. 검은 안개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경계했다. 녀석의 등털이 스르륵 곤두섰다. '이거 첫 만남부터 좀 험한데.' 나는 손을 천천히 들어 보였다. 일단은 오해를 풀어야 했다.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최대한 느릿하게 두 손을 펼쳤다. "저, 오해십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구경하던 중이었어요." 나는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지었다. 근위병 중 하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자가 흔치 않은데." 그가 창끝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게다가 그 짐승, 마기가 느껴지는군." 그가 덧붙였다. '귀신같이 알아채네, 저 사람.'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10년 전 죽은 걸로 되어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살아 돌아왔다고 하면, 누가 그걸 믿어줄까. '서진우입니다, 라고 하면... 아마 정신병자 취급받겠지.' 아니면 사칭꾼으로 몰려 그 자리에서 포박당할 수도 있었다. 영웅의 이름을 사칭하는 건 죄가 꽤 무거울 게 뻔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근위병들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창끝이 이제는 내 가슴께를 향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짐승이 내 앞으로 슬쩍 몸을 옮기며 자세를 낮췄다. '야, 너 지금 나 지키려는 거야?' 기특했지만, 지금 저 창들 앞에서 짐승 하나 믿고 버틸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이름과 신분을 밝히시오." 대장으로 보이는 근위병이 말했다. "밝히지 않으면 왕도법에 따라 구금할 수밖에 없소." 그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이름을 밝히라니.' 바로 저 등 뒤에 서 있는 석상에 새겨진 그 이름을 말해야 하는데. 말하는 순간 어떤 소란이 일어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나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기 직전,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을 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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