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년 만에 찾은 친구가 용사라니

5화

우연은 세 번쯤 겹치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용사와 나 사이에 벌어진 마주침은 이미 그 선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엔 시장이었다. 향신료 상인이 목청을 높이며 손님을 부르는 좁은 골목에서, 나는 저녁거리로 쓸 만한 뿌리채소를 고르다가 그녀와 어깨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짧게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웅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나를 알아보는 듯 머물렀다가 황급히 비껴갔다. '그냥 눈이 마주친 거겠지.' 그때는 그렇게 넘겼다. 두 번째는 우물가였다. 나는 물통을 채우려고 줄을 서 있었는데, 그녀가 저 앞에서 두레박을 끌어올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또 보네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그 말투에서 뭔가 익숙한 리듬을 느꼈다.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살피는 말투, 그건 낯선 용사가 낯선 나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다는 뭔가를 조심스레 숨기는 사람의 말투였다. 세 번째는 훈련장 앞이었다. 나는 볼일이 있어 그 앞을 지나가다가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봤는데, 훈련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물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이 근처에 자주 오시나 봐요." 별일 아닌 척 몇 마디를 건네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는데, 그 짧은 대화들 속에서 나는 자꾸 낯익은 조각들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그녀가 무의식중에 팔짱을 낀 채 왼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버릇, 그건 하연이가 시험 전에 초조할 때 하던 버릇 그대로였다. 손끝으로 옷자락을 두 번 접었다가 펴는 습관도, 말끝을 흐릴 때 시선을 살짝 위로 올리는 것도 전부 익숙했다. '이건 확실히 뭔가 있어.' 나는 그날 결심을 굳혔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우연이 겹칠 리가 없다, 이건 마치 던전 입구마다 같은 슬라임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뻔한 설계 아닌가.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겠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저녁 무렵 숙소 근처 작은 언덕에서 그녀가 혼자 검을 손질하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아 주황빛과 남색이 뒤섞여 있었고, 언덕 아래로는 훈련장의 횃불들이 하나둘 켜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천 조각으로 검날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는데, 그 손길이 어딘가 기계적이면서도 정성스러워서, 검을 다루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고, 그녀는 나를 힐끗 보고도 별말 없이 검 손질을 계속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줬다. 사실 침묵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저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혹시 한국이라는 나라 아세요?" 그녀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는데, 나는 그 정지가 대답보다 더 크게 들렸다. 검을 문지르던 천 조각이 검날 위에서 딱 멈춰 있었고, 그 몇 초의 침묵 동안 언덕 아래 훈련장에서 병사들의 구령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몰라." 대답은 짧았고, 그 짧음 속에 뭔가 억지스러운 게 섞여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거 완전 어색한데. 진짜 몰라서 저러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 저러는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옆얼굴을 살폈다. 다시 검을 문지르기 시작한 손길이 아까보다 조금 빨라졌다는 것도, 시선이 검날에만 고정되어 있다는 것도 나는 다 눈치챘다. 마치 시험 답안지에 정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오답을 적는 학생 같았다. 나는 더 밀어붙일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금 더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김하연 아니에요?"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나는 분명히 봤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한 동요였다. 그녀는 검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는데, 그 눈빛에는 놀람과 경계, 그리고 뭔가 억누르는 듯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닫아뒀던 문틈으로 갑자기 빛이 들어온 사람의 표정 같았다. "그건 어디서 들은 이름이지." 되묻는 말투가 이상하게 방어적이었고, 나는 그 방어적인 태도야말로 확신을 굳히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어.' 만약 정말 모르는 이름이었다면 "그게 누군데" 하고 되물었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대신 어디서 들었느냐고, 출처를 캐물었다. 그건 이미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다시 물었다. "중학교 3학년, 서울, 철길 건널목. 기억나요?"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고, 나는 그 얼굴에서 5년 전 헤어지던 순간의 하연이 얼굴을 정확히 겹쳐 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다시 다물어지는 모습, 눈가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 그건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던 그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등을 돌리고 언덕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는데, 그 뒷모습이 마치 뭔가에게 쫓기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쫓아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방금 그 반응이 확실한 긍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녀가 도망치듯 자리를 뜬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질하다 만 검이 언덕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주워 들고 한참을 바라봤다. 자루에 감긴 가죽끈이 낡아 있었고, 검날에는 그녀의 손길이 남긴 기름 자국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이걸 두고 갔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정말 급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뭔가를 남기고 싶었던 걸까.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 검을 챙겨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훈련장 불빛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내일은 반드시 답을 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굳어버린 표정이, 도망치듯 사라진 뒷모습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5년이라는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지, 나는 그때까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녀가 처음부터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5년의 시간이 얼마나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는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이미 부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도, 나는 그날 밤에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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