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년 만에 찾은 친구가 용사라니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지하철을 놓쳤나' 하는 거였다. 알람도 못 듣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가 첫차를 놓쳤을 때의 그 익숙한 절망감, 딱 그 느낌이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그곳은 서울 어디에도 없는 낯선 숲 한가운데였다.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건 아스팔트가 아니라 축축한 나뭇잎이었고, 코끝에 닿는 공기는 지하철 냄새 대신 흙과 이끼, 그리고 뭔가 비릿한 냄새를 함께 실어 왔다. 머리 위로는 형광등이 아니라 처음 보는 색의 하늘이 두 겹으로 겹쳐 있었는데, 마치 누가 하늘을 반투명한 셀로판지 두 장으로 덧대놓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5년째 찾아 헤매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균열 속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이거다, 이게 하연이가 사라졌던 그거잖아.'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김하연이 서울 외곽 철길 건널목에서 검은 균열과 섬광 한 번에 사라졌던 그날, 나는 하연이의 손을 놓친 게 아니라 딱 두 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 장면을 오백 번쯤 되짚어봤다. 신발끈이 풀려서 잠깐 멈춰선 그 몇 초 사이에 하연이는 그냥, 사라졌다. 경찰은 실종으로 처리했고 가족들은 얼마 못 가 이사를 갔고 세상은 금방 그 일을 잊었지만 나는 잊지 못했다. 대학 생활 내내 그 건널목 자리를 서성이며 사진을 찍었고, 균열이 생겼다 사라졌다는 목격담이 올라오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밤마다 뒤졌고, 알바를 두 개나 뛰면서도 주말마다 그 자리에 가서 몇 시간씩 서 있었다. 그 5년의 집착이, 그러니까 남들 눈엔 정신 나간 짓으로 보였을 그 시간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보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무릎이 후들거려서 다시 주저앉았는데, 그건 공포보다는 이상한 흥분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인정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손끝이 떨렸는데 그게 두려움의 떨림인지 기대의 떨림인지 구분이 안 됐다. '드디어 왔다. 이제 찾을 수 있어.' 하지만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낮은 울음소리, 그것도 사람의 것이 아닌 뭔가의 것이 분명한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곳이 감동적인 재회 서사의 무대가 아니라 그냥 생존 게임의 초기 스테이지라는 걸 실감했다. 스마트폰을 꺼내봤지만 화면 상단에는 신호 안테나 대신 X표시만 떠 있었고, 배터리는 이 세계에서도 정직하게 줄어드는지 이미 절반이 날아가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러봤지만 발신음조차 나지 않았고, 문자 메시지도 전송 대기 상태로 멈춰 있었다. '와이파이도 안 되는데 여긴 대체 뭐 하는 세계야. 이럴 거면 서울 요금제 그대로 왜 따라온 거야.'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으려다가, 나는 이 시점에서 이미 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체력장에서 늘 하위권이었고, 자취방 라면 봉지 하나도 힘겹게 뜯던 손목이었으며, 마법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이 세계의 생태계 서열 어디쯤에 내가 위치해 있을지는 굳이 계산해보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최하위,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최하위. 물 한 병도, 손전등도, 하다못해 우산 하나도 없이 떨어진 나는 그냥 이 숲에서 가장 만만한 먹잇감일 뿐이었다.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고, 숨을 참으며 나무 틈으로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 늑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무언가가 나를 향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높이만 해도 내 허리께를 훌쩍 넘었고, 입가에는 마른 핏자국 같은 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건 아니지, 나 아직 하연이도 못 찾았는데. 이런 데서 이렇게 죽으면 걘 누가 찾아.' 도망치려고 발을 뗐지만 다리가 나뭇잎에 미끄러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짐승의 고개가 정확히 내 쪽으로 돌아왔다. 짐승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이상하게 느리게 흘렀다. 나는 이 순간이 인생 통틀어 가장 비싼 리액션 타임을 요구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몸은 그 요구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뒷걸음질을 치려 해도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에서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짐승이 앞발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하연이가 저기 어딘가에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다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사람이 죽기 직전엔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나한테 스쳐 지나간 건 오직 하연이의 얼굴 하나뿐이었다. '죽기 직전에 걔 생각부터 하는 거 보면 답 나왔네. 나 진짜 이 정도로 미쳐 있었구나.'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짐승의 몸이 무언가에 튕겨 나가듯 옆으로 날아갔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와 짐승의 짧은 비명 같은 신음이 뒤섞여 숲을 울렸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검은 보브머리에 고양이 귀가 쫑긋 서 있는 누군가가 내 앞에 착지하는 걸 보았다. 흙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드러난 실루엣은 가늘고 곧은 목선과, 달빛 아래에서도 유난히 새하얗게 빛나는 목덜미를 가진 여자였다. 등에 멘 무기에서는 아직도 잔향처럼 바람 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뭐야, 코스프레야?' 이런 한심한 생각이 먼저 든 걸 보면 나는 아직 이 세계의 무게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눈동자 색이 이 세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색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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