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년 만에 찾은 친구가 용사라니

3화

숲의 초입에서 소야를 따라 걸어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는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무는 지구의 것보다 훨씬 굵고 잎사귀는 이상하게 반짝이는 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판타지 세계관은 나무한테도 후처리 필터를 씌우나 보네' 하고 속으로 실없는 감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무들 사이로 트인 공터에 들어서는 순간, 그 여유는 한순간에 증발해버렸다. 흑발이 어깨를 넘어 등까지 흘러내리는 그 실루엣을 보는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는데, 얼굴 윤곽이며 눈매의 각도까지 어딘가 익숙한 데가 있어서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고, 발끝이 땅에 닿는 감각조차 흐릿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 '설마'는 걸음을 옮길수록 확신에 가까워졌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윤곽은 점점 선명해졌고, 선명해질수록 내 기억 속 얼굴과 겹치는 부분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목구비는 조각가가 대리석을 깎다가 인간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봐 중간에 멈춘 것처럼 균형 잡혀 있었고, 콧날은 서늘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입술에서 끝났는데 그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각도까지도 내가 5년 전에 알던 그 사람의 웃는 버릇과 겹쳐 보였다. 눈썹은 짙고 곧게 뻗어 있었는데 그 아래 자리한 눈은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짙은 갈색이었고, 턱선은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서도 각이 살아 있어서 마치 대리석 위에 그림자만 살짝 얹은 것 같았다. 5년 전이라면 저 얼굴에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살이 붙어 있었을 텐데, 시간이 그 얼굴에서 여분을 다 깎아내고 뼈대만 남긴 느낌이었다. '5년이면 사람 얼굴도 저렇게 조각처럼 변하나.' 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는데, 그쪽도 나를 보고 있었지만 표정에서 어떤 동요도 읽히지 않았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이상해서 나는 손목을 매만졌다. 긴장하면 손목을 만지는 게 내 오래된 버릇이었는데, 이 세계에 와서도 몸은 그 버릇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왜 아무 반응이 없어.' 5년 전 알던 사람이라면, 아니 정말 알던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에 뭐라도 티가 나야 하는 게 아닌가. 놀라움이든 반가움이든 부정이든, 뭐라도. 소야가 앞장서서 그녀에게 다가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 근처에서 전이자 발견해서 데려왔어요, 용사님. 숲 초입 쪽 균열 근처에서 발견했는데, 다행히 마물이랑 마주치기 전에 저희가 먼저 찾았어요." 용사라는 호칭이 붙는 순간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이 세계에도 그런 직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실감하니 판타지 소설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용사라니, 무슨 게임 캐릭터 이름 같은 거.' 회사에서 신입사원 명함에 '대리'라고 찍히는 것도 웃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세계에서는 명함에 아마 '용사'라고 찍히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어이없게도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애써 표정을 눌러 담았다. 그녀는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친 곳은 없나." 목소리는 낮고 담백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하연이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고 단단해서 순간 확신이 흔들렸다. '5년이면 목소리도 변하나.' 사람 목소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아니면 애초에 내가 하연이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사람의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데 능숙했으니까.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없다고 짧게 답했고, 그녀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소야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균열 위치 다시 표시해두고, 마물 흔적 있으면 보고서 올려. 오늘 안으로." "넵, 알겠슴다!" 소야는 장난스럽게 손을 이마에 붙여 경례를 했고, 용사는 그 경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만약 저 사람이 정말 하연이라면, 나를 보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5년 전 우리 사이가 그렇게 가벼운 인연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보는 것처럼 담담했다. '알아본 거면 저럴 리가 없잖아, 못 알아본 거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데, 하연이가 나를 잊었다는 가정보다는 저 사람이 하연이가 아니라는 가정이 훨씬 덜 아팠기 때문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진실을 마주하는 것보다 편한 거짓을 붙잡는 쪽으로 자꾸 기울어졌다. 나는 그 기울어짐을 애써 정당화하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동료 하나가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는데, 금발 롱헤어에 흰 로브를 걸친 그녀는 성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로브의 소매 끝에는 은실로 수놓인 문양이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그 문양이 햇빛을 받아 살짝 일렁였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었고, 눈매는 둥글게 휘어져서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잔주름이 살짝 잡혔는데 그 잔주름이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백설아예요. 놀랐죠, 갑자기 이런 세계로 떨어져서." 백설아의 목소리는 소야만큼 가볍진 않았지만 온화했고, 나는 그 다정함에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낯선 세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친절이 이렇게 사무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회사에서 상사가 커피 한 잔 사주는 것에도 감동했던 내가, 이제는 완전히 낯선 세계에서 낯선 사람의 다정한 말투 하나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니 스스로도 좀 웃겼다. '나 이렇게 감정에 헐거워졌었나.' "괜찮아요, 조금 얼떨떨하긴 한데." 내가 대답하자 백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신중했다. 소야가 그 옆에서 팔짱을 끼며 끼어들었다. "설아 언니가 성녀라서 그런지 다들 처음 만나면 울어요. 저는 처음에 안 그랬는데." "넌 원래 좀 특이하잖아." 백설아가 웃으며 받아쳤고, 소야는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짧은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는 공포감이 이런 사소한 농담 몇 마디로 옅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용사는 잠깐 나를 다시 쳐다봤는데, 그 시선이 아주 짧게 머물다가 곧 거둬졌다. 나는 그 순간의 시선에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지만 그게 뭔지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눈빛이라는 게 원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보를 담고 있는 법인데, 그 순간의 눈빛은 분명 무언가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나에게 알려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냥 신기해서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어깨의 긴장을 풀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 짧은 시선 안에 담긴 게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용사는 곧 발걸음을 돌려 숲 안쪽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이상한 오한을 느꼈다. 마치 방금 지나간 순간이,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의 아주 작은 서곡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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