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로, 도훈은 매일 새벽 그 공터로 향했다.
동이 트기 전, 산길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슬 맺힌 풀잎이 발목을 스칠 때마다 차가운 감촉이 스며들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도훈은 그 서늘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움이 정신을 깨우는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아는 매번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 중 하루꼴로, 예고 없이 소나무 위에 앉아 있거나, 공터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도훈은 홀로 권법을 반복했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소리만이 유일한 동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날이면, 공터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도훈은 그녀가 나타나는 날이면 마음이 들뜨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졌네."
설아의 짧은 평가 하나가, 도훈에게는 그 어떤 보상보다 값졌다. 그녀는 권법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초식의 흐름, 무게중심의 이동, 호흡의 박자까지.
"여기, 이 부분에서 어깨가 먼저 나가."
설아가 손끝으로 도훈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켰다.
"어깨가 먼저 나가면?"
"중심이 흐트러져. 발이 아니라 어깨가 이끄니까, 다음 초식으로 넘어갈 때 한 박자씩 늦어지는 거야."
도훈은 그 말대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어깨는 최대한 늦게 따라오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몸이 기억하기까지는 수십 번의 반복이 필요했다. 설아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미간을 좁혔다.
"너, 진짜 아무것도 안 배웠다는 거 못 믿겠어."
도훈이 웃으며 말하자, 설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보는 눈이 있는 거야."
"어디서 그런 눈을 얻었는데?"
설아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옅은 빛이 감도는 새벽하늘이었다.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그 별빛을 담은 듯 조용히 빛났다.
도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물어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며칠 사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대신 그는 그녀의 침묵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침묵도, 함께 있는 방식 중 하나였다.
***
그러던 어느 날, 도훈은 우연히 다른 것을 목격했다.
산 아래 마을 어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목이었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 마을의 지붕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훈은 낯선 소란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작은 초옥 앞에서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낮게 시작된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또 몰래 나갔다며?"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도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엿듣는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궁금함이 동시에 그를 붙잡았다.
"어디까지 갔었어? 말해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익숙한 흰 그림자가 초옥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체구, 고개를 숙인 자세, 흰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모습.
'설아······?'
놀란 도훈이 몸을 더 낮췄다. 나뭇가지가 어깨를 스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초옥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여보, 너무 몰아붙이지 마오. 애가 답답해서 그런 거지."
"답답하다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면,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여인의 목소리엔 분노보다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목소리가 갈라질 듯 떨렸다.
"그 아이가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당신은 정말 몰라서 그래요? 사람들 눈에 띄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초옥 안을 채웠다.
"설아 너, 다시는 혼자 나가지 마. 알았어?"
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도훈의 눈에 보였다.
도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가슴 한복판이 무언가에 눌린 듯 묵직했다.
'왜 저렇게까지······'
단순히 어린아이가 걱정되어서 하는 잔소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은, 그보다 훨씬 깊고 절박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마치, 세상 전체로부터 딸을 숨기려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사람들 눈에 띄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 말이 유독 도훈의 귓가에 남았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산에서 뛰어내리는 것 정도로 저렇게까지 몰아붙일 부모가 있을까.
초옥 문이 닫히고, 조용해졌다.
도훈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발밑에서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다음 날 새벽, 도훈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공터로 향했다. 밤새 뒤척였던 탓인지,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더 빨랐다.
설아는 그날도 나와 있었다. 소나무 아래,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새벽빛이 그녀의 흰 옷자락 위로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훈이 다가가자 설아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봐?"
도훈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었다.
"너, 어제 집에서······"
설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나른한 새벽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봤어?"
"우연히.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어."
설아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듯 몸을 웅크렸다. 그 작은 몸이 더 작아 보였다.
"부모님이, 너 나오는 걸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걱정이 아니야."
설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뭐가 걱정이 아니야."
"두려운 거지. 내가 뭔가······ 될까 봐."
"뭐가 될까 봐?"
설아는 그 질문에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도훈은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한참 후, 설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 몰라. 그냥,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만 알아."
"다르다는 게, 그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거?"
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도, 더 많아."
"예를 들면?"
설아는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눈동자에 잠깐 두려움 같은 것이 스쳤다. 마치 말을 꺼내는 순간,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작될 것처럼.
"말 못 해. 아직은."
"아직은?"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지도."
그 말이 묘하게 도훈의 마음에 남았다. 무언가 크고 알 수 없는 비밀이, 이 작은 소녀의 몸 안에 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비밀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도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곁에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지금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음을 삼키는 것도, 어쩌면 함께한다는 것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럼 오늘은 권법 안 봐줘?"
도훈이 화제를 돌렸다. 설아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돌아왔다.
"봐줄게. 대신, 오늘은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어."
"왜?"
"부모님이 아침에 먼 곳에 가셨어."
도훈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잠깐이지만, 그녀에게 자유로운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두 사람은 그날 오전 내내 공터에 머물렀다. 도훈은 권법을 반복했고, 설아는 그 옆에서 자세를 지적하며 시간을 보냈다.
"팔을 뻗을 때, 손끝이 아니라 팔꿈치가 먼저 열려야 해."
"이거는 왜 그런 거야?"
"팔꿈치가 열리면, 힘이 어깨에서 손끝까지 끊기지 않고 흘러가. 손끝만 뻗으면 거기서 힘이 멈춰."
도훈은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몸을 움직였다.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며 공터를 밝혔다. 이슬이 마르고, 풀잎이 옅은 초록빛을 되찾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짧아졌다가 다시 길어지는 사이, 도훈은 몇 번이고 같은 초식을 반복했다. 팔이 저릿해질 때까지,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너, 힘든 거 안 티내려고 하는 거 다 보여."
설아가 웃으며 말했다.
"안 힘들어."
"거짓말. 다리 떨리잖아."
도훈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저 멀리 산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웃음기가 씻겨나간 듯 사라졌다.
"누가 와."
도훈이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낯선 그림자가 산길 아래에서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 규칙성 안에 서두름이 배어 있었다.
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가야 해."
"잠깐, 저게 누구······"
설아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낮게 속삭였다.
"저 사람, 우리 집 사람 아니야."
"뭐?"
설아의 눈빛에 처음으로 명백한 경계심이 서렸다. 지금까지 도훈이 보아온 그녀의 어떤 표정과도 달랐다. 두려움과 경계, 그리고 그 사이에 숨겨진 무언가 더 깊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