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새벽을 걷는 주먹

4화

며칠 후 새벽, 도훈은 여느 때처럼 산길로 향했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산기슭에 걸린 안개가 발밑을 감싸고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희미했다. 도훈은 그 어스름 속을 익숙하게 걸었다. 십 년 가까이 매일같이 걸어온 길이었다. 발이 먼저 길을 기억했다. 능선을 넘어 조금 더 깊은 곳, 평소 잘 다니지 않던 오솔길로 발을 들였다. 마음이 어수선한 날이면 도훈은 종종 새로운 길을 찾아 걸었다. 익숙한 길보다 낯선 길이, 생각을 비우기엔 나았다. '박도협.' 그 이름이 또 떠올랐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날 들었던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재능 없는 놈이 왜 무공을 배우느냐는 비웃음.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도훈은 그 소리를 떨쳐내려 걸음을 서둘렀다. 오솔길 끝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그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무의 그늘이 새벽빛을 가려, 공터 전체가 조금 더 어두웠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도훈은 그곳에서 권법을 시작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파랑권부터.' 주먹이 뻗었다. '퍽!' 새벽의 정적 속에 그 소리가 낮게 울렸다. 허공을 가르는 손끝에서 미세한 바람이 일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초식이 이어졌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생각은 필요 없었다.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온 동작이었다. 내공이 없어도, 이 동작만큼은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도훈이 가진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주먹을 뻗고, 발을 딛고, 몸을 회전시켰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가 한참 몰입해 있을 때, 무언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등골이 서늘했다. 분명 누군가의 시선이었다. 도훈은 동작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공터에는 그와 소나무, 그리고 흩어진 새벽 안개뿐이었다. 그러나 분명, 시선이 느껴졌다. 뒤통수에 꽂히는 듯한, 집요하고 또렷한 시선이었다. '누가 있나?' 도훈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소나무의 굵은 줄기를 따라, 가지 사이를 훑었다. 그리고 그곳에, 소녀가 앉아 있었다. 백발이 새벽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놀랍게도 맨발이었다. 발밑엔 서리가 앉아 있었으나, 소녀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서리가 소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뭐지.' 이 산에서 자란 지 십 년이 넘었다. 이런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마을 아이들 얼굴은 전부 알고 있었다. 저런 백발도, 저런 맨발도, 저런 눈동자도, 어디에도 없었다. "너, 언제부터 거기······" 소녀는 대답 대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도훈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녀는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휙―!' 사,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도훈은 저도 모르게 놀란 숨을 삼켰다. '뛰어내린다고?' 일반적인 아이라면 뼈가 부러질 높이였다. 도훈의 눈이 반사적으로 소녀의 자세를 좇았다. 팔의 각도, 무릎의 굽힘, 낙하하는 속도까지. 그러나 소녀는 가볍게, 마치 깃털처럼 지면에 내려앉았다. 무릎 한 번 꺾이지 않았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저건 대체······' 도훈의 눈이 소녀의 맨발을 향했다. 흙바닥에 서리가 앉은 그 위를,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발바닥이 그대로 서리를 밟고 있는데도, 얼음이 녹지 않았다. '사람이 맞나.' 의문이 스쳤지만, 그보다 먼저 눈앞의 존재가 주는 이상한 압박감이 도훈을 붙잡았다. 기척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힐까.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거, 다시 해줄 수 있어?" "······뭐?" "권법. 처음부터." 도훈은 어리둥절했다. 낯선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권법을 다시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너는 누구야? 왜 여기 있어?" 소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 동작이 이상하게도 사람 같지 않았다. "보여줘." 그 눈빛에는 이상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도훈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훈은 잠시 망설였다. '이상한 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 눈동자 앞에서 다시 자세를 잡고 싶은 묘한 욕구가 일었다. 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파랑권.' 주먹이 뻗었다. 이어서 초식들이 이어졌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몸이 조금 더 긴장했다.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 평소와 다른 감각을 만들어냈다. 소녀는 그 모든 동작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시선이 손끝을 따라 움직이고, 발의 위치를 따라 움직였다. 그 집중력이 여덟 살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 초식을 마쳤을 때, 도훈의 숨은 완전히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소녀가 손뼉을 쳤다. '짝, 짝.' "잘한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도훈에게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들어본 어떤 말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진짜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꼈다. "응. 내공 하나 없이 이 정도 속도랑 정확도, 처음 봐." 도훈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공이 없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의문이 스쳤으나, 그보다 먼저 벅차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십 년간 홀로 해온 수련을, 처음으로 누군가가 알아봐 준 순간이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던 그 새벽들이, 갑자기 의미를 가진 것 같았다. 박도협의 말이 남긴 상처가, 이 짧은 순간에 조금씩 아무는 듯한 느낌이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도훈은 그것을 애써 참았다. "너, 이름이 뭐야?" "설아." "성은?" 소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몰라도 돼." 대답이 이상했다. 그러나 도훈은 그것을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그보다 더 컸다. "나는 이도훈이야." "알아." "어떻게?" 설아는 대답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신비로웠다. 어린아이의 웃음인데, 그 안에 무언가 깊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 두 사람은 그날 아침, 공터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며 안개가 걷혔다. 나무 그늘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고, 그 빛이 설아의 백발에 닿아 은은하게 반사됐다. 설아는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도훈이 묻는 대부분의 질문에 "몰라도 돼"거나 짧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러나 도훈의 권법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정확한 지적을 던졌다. "세 번째 초식에서, 발끝 힘이 조금 새는 것 같아." "어떻게 알아?" "보이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도훈은 그 말에 다시 시범을 보였다. 세 번째 초식을 천천히, 몇 번씩 반복했다. "여기, 발목이 살짝 꺾이는 거 보이지?" 설아가 손가락으로 정확한 지점을 짚었다. 도훈은 놀랐다. 그것은 서준도 지적하지 못한 미세한 부분이었다. 스승도 없이, 오로지 눈으로만 배워온 도훈의 권법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 하나를 짚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발목을 좀 더 세워봐." 도훈은 시키는 대로 동작을 고쳤다. 몸의 중심이 확실히 달라졌다. 발끝에서 새던 힘이, 이제는 고스란히 무릎으로, 허리로 전해졌다. "오, 이거……" "낫지?" "어, 훨씬 나아." 도훈은 감탄한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너, 무공을 배웠어?" 설아는 그 질문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아니."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 느껴졌다. 도훈은 그 표정 변화에 조금 당황했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낯선 벽이 그 순간 세워진 느낌이었다. '뭐지, 이 반응은.' 그러나 캐묻는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도훈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내일도 여기 올 거야?" 설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방금까지의 냉랭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스쳤다. "모르겠어. 나갈 수 있을지······" "나갈 수 있을지?" "부모님이······" 말끝이 흐려졌다. 설아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도훈을 향했다. 도훈은 그 잠깐의 흔들림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캐물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해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공터를 감싸던 서늘한 새벽 공기도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해." "벌써?" "응." 설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맨발로 산길을 걷는 모습이었으나, 걸음걸이엔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다. 발밑의 자갈도, 나무뿌리도, 그 무엇도 소녀를 방해하지 못했다. 도훈은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숲 사이로 사라진 백발이, 마지막까지 새벽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하루 종일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에는, 이상하게도 또 다른 질문이 하나 더 매달려 있었다. '저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산길을 내려오는 도훈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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