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침 여섯 시, 나는 눈을 뜨자마자 협탁 위 달력을 확인했다.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청화 왕립 학원 입학식.
왕위 계승권 3위, 제3공주 윤서린의 첫 등교일이었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빛이었고, 정원의 백목련 나무 가지 사이로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게 보였다.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정원사가 벌써 나와 화단을 손질하고 있었고, 그 규칙적인 손놀림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조용히, 별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겹쳐졌다.
곧 시녀 셋이 들어와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녀가 속옷을 정리하는 동안, 두 번째 시녀는 다리미로 갓 다린 원피스를 들고 왔다.
"공주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세 번째 시녀가 머리를 빗으며 웃었다.
나는 그 말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특별한 날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그다지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마법 실습 낙제 세 번, 검술 실기 최하위, 예법 시험 평균 이하.
내 성적표는 왕궁 안에서 이미 유명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다른 왕자와 공주들의 시종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왕녀가 되었고, 그 사실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기대받지 않으면 실망시킬 일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공주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시녀장이 문을 열며 말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한 번 더 살폈다.
연두색 리본으로 묶은 옅은 금발, 왕실 문장이 새겨진 은빛 브로치, 열여섯 살치고는 다소 작은 체구.
목에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자수정 목걸이를 걸었는데, 그것마저 너무 화려해 보이지 않도록 옷깃 안쪽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다행인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에서 나는 오늘의 목표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눈에 띄지 않는다.
둘째, 사고를 만들지 않는다.
셋째, 신입생 총대 연설만 무사히 마친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나는 손끝으로 무릎 위 치맛자락을 꾹 눌렀다.
총대 연설은 설화 백작부인이 나를 위해 손수 마련해준 자리였다.
그분은 나를 왕위 후보로 밀어주는 파벌의 중심인물이었고, 지난달 나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었다.
"서린 공주님, 이번 연설은 공주님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리는 자리가 될 겁니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위장이 조금씩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분의 신임을 잃을까 봐 늘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마차 안에서도 몇 번이나 연설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존경하는... 아니,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몇 번을 고쳐도 입안이 마르는 건 똑같았다.
학원에 도착하니 정문 앞은 이미 인파로 가득했다.
수십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 문마다 하인들이 바쁘게 오갔다.
내가 탄 마차 앞에도 마부가 서둘러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사방에서 수백 명의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이쿠, 미안!"
낡은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찬 남학생이 내 앞에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교복 재킷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소매 끝에는 오래된 문장이 실로 대충 꿰매져 있었다.
가문의 문장치고는 지나치게 낡아서, 나는 순간 저게 진짜 문장인지, 아니면 그냥 헌 옷을 물려 입은 건지 헷갈렸다.
"괜찮아?"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잔 상처가 여러 개 나 있는 게 보였다.
"어... 괜찮아요."
나는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다.
"나 강주혁이야. 오늘 처음 왔어."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크고 시원해서, 주변 몇몇이 우리를 돌아볼 정도였다.
"윤서린이에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이름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왕가의 성을 붙이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보통 사람들은 내 이름 뒤에 붙는 '윤' 자를 듣고 나서야 눈치를 채곤 했는데,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 나는 강당 앞에서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명함 같은 걸 주고받는 사이, 강주혁은 나를 따라와 옆에 나란히 섰다.
"너 왠지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걱정 있어?"
그가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오늘 하루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내가 대답했다.
"조용히? 재미없잖아!"
그가 손사래를 쳤다.
"학원 생활이 얼마나 재밌는데. 축제도 있고, 대회도 있고, 결투도 있고!"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말했다.
"나는 재미없는 게 좋아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결투 같은 건 딱 질색이에요."
내가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순간 반짝여서, 나는 그가 화가 났나 싶어 몸이 살짝 굳었다.
"그럼 나랑 친구 하자. 심심하지 않게 해줄게."
나는 그냥 예의상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식의 인사는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었고, 대부분은 그날이 지나면 잊혔다.
"네, 좋아요. 뭐든 진심으로 해주면 좋겠네요."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 흔히 주고받는 빈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강주혁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진심으로?"
그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어, 네. 뭐 그런 뜻으로요."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강당 종이 울려서, 우리는 서둘러 각자의 줄로 흩어졌다.
입학식이 시작되고, 나는 자리에 앉아 며칠 뒤 있을 총대 연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이 떨렸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고, 설화 백작부인이 멀리서 나를 향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입학식이 끝난 뒤, 강주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시녀장이 기다리는 마차로 돌아가는 내내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강주혁.
낡은 검, 떨어진 단추, 헌 옷 같은 문장.
그리고 그 이상한 눈빛까지.
나는 그날 저녁까지 그 대화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